지난 여름, 유럽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중 의외로 러시아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통계가 나왔다. 철의 장막이 걷힌 것 정도가 아니라 개방의 물결을 타고 신흥 부유층들이 급부상하면서 유럽의 주요 쇼핑 거리는 러시아 화폐로 시즌 호황을 누린다는 설명이 뒤따르기도 했다. 매서운 혹한의 겨울을 보내면서도 발레나 서커스 같은 독특한 놀이문화를 발전시킨 이 나라의 다양한 모습들은 수도, 모스크바에서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다. 숱한 혁명과 봉기. 반란으로 인해 정체(政體)가 변했던 러시아. 하지만 놀라운 것은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지 못한 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음울한 미래를 놓고도 이 나라 사람들은 세계 최고의 문학과 음악을 꽃피웠고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발레의 성숙한 토양을 제공해 왔다. 또 그 어느 나라보다도 옛 건물들에 대한 보존에도 힘을 기울여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과 왕궁을 그대로 지켜 왔다. 그래서 어둠과 빛의 나라로 기억되는 러시아엔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예술적 미감이 존재한다. 수도인 모스크바의 첫 인상은 고딕과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 그리고 스탈린 스타일의 건축물들로 형성한 스카이라인이다. 매연으로 희뿌연 거리를 대하게 되면 누구든 삭막하고 을씨년스런 곳이란 생각을 감출 수 없다. 겨울에는 오전10시 반쯤 해가 떠서 오후 3시만 넘어도 벌써 어두워지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어떠리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체제가 다르고 어두운 시기를 보냈던 만큼 러시아 인들은 밤에도 두툼한 커텐으로 불빛을 막는 습관 때문에 도시의 야경이 다른 도시들에 비해 밝은 편이 아니다. 이런 생각들은 모스크바 관광의 기점이라 할 수 있는 크렘린에 가서 더욱 생생해진다. '성벽'을 의미하는 러시아 어인 크렘린은 모스크바를 찾는 모든 관광객들이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이다. 원래는 '유리 도르고르키' 공이란 사람이 이곳에 성벽을 쌓고 해자를 파기 전까지만 해도 보잘 것 없는 농촌에 불과했다고 한다. 당시의 성벽은 목조였는데 면적은 지금의 10분의 1에도 못미치는 정도였고 13세기 후반에 들어서 알렌산드르 네프스키 공의 아들이 상주하면서 저택과 창고, 마굿간 등의 건물이 들어섰다고 한다. 15세기에 지금의 크렘린 성벽과 교회가 세워졌는데 우스펜스키 사원, 아르항겔리스키 사원, 블라고 베시첸스키사원이 대개 이시기의 것들이다. 크렘린이 황금 시대를 맞이했던 때는 17세기로 짜르(황제)가 기거했었다. 표트르 대제가 수도를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기면서 잠시 쇠퇴기를 가졌지만 나폴레옹 전쟁 이후 다시 복원하면서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크렘린 북동쪽에는 역사적 사건으로 세계에 알려진 붉은 광장이 있다. 넓이만 해도 무려 7만3천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크렘린 성벽을 제외하곤 붉은 빛을 띄는 것을 좀처럼 볼 수 없는 데도 이곳이 붉은 광장으로 불려지는 이유는 전에 이곳이 노동자 제전인 5월 1일이나 11월 7일 혁명 기념일 식전장으로 활용됐을 당시 붉은 색을 기조로 한 현수막들이 주변 건물들에 휘장처럼 둘러쳐졌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붉은 깃발을 손에 들어 광장이 붉은 색으로 물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설일 뿐이고 원래 붉은 광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크라스나야라는 러시아의 고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크라스나야라는 말이 지금은 '붉은 광장'이라는 말로 의미가 통하고 있지만 본래는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크라스나야 폴로시차지(붉은 광장)라고 부르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의 일이고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단장된 것은 19세기 말 무렵이었다. 이곳에는 기념비적인 건물들과 화려한 성당, 굼 백화점, 그리고 레닌의 묘가 있다. 광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곳은 역시 성 바실리 사원. 불균형의 조화를 엿볼 수 있는 이 사원은 한가운데 있는 47m 높이의 양파 머리 지붕이 인상적이다. 이반대제가 카잔 칸을 항복시킨 것을 기념하여 짓도록 한 건물로 사원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다시는 이처럼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지 못하도록 설계자의 눈을 뽑아버렸다는 잔혹한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러시아의 겨울 밤은 정말 길다. 오후 3시만 되면 금새 주위가 깜깜해지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의 나이트 라이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다. 백야의 여름에는 극단이나 발레단이 순회 공연을 하기 때문에 극장도 휴관하는 경우가 많지만 겨울 만큼은 날마다 다양하고 화려한 쇼와 무대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경제 환경에 비해선 세계 최고의 문화 수준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서커스와 발레, 오페라 같은 경우는 어디든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예술가들로 북적거리고 각국에서 많은 유학생들이 몰려오기도 한다. 그래서 어쩐지 러시아의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져온 것 같다. 활동이 가능한 낮에는 정치와 혁명, 사상을 논하고 주위가 어두워지는 밤에는 예술과 문학을 꽃피우고. 빛과 어둠, 어둠과 빛이 함께 자연스런 모습으로 공존하는 것이다. < Travel tips > 가는 방법 =모스크바까지는 대한항공(수,일/02-656-2000)과 러시아항공(매주 수,금,일/02-777-4200)이 정기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소요시간은 인천출발이 9시간 45분이며 돌아올 때는 기류 때문에 8시간 20분 걸린다.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는 국내선을 이용해야 한다. 소요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 기타정보 =러시아를 여행하려면 입국비자가 필요하다. 러시아 대사관(02-538-8876) < 글 = 이유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