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 달리는데 여성 숙련공들이 공단으로 모두 빠져나가 납품기일을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거예요.앞이 캄캄하더군요." 윤종현 사장은 해결책을 찾던 중 우연히 교도소에서 군복과 책·걸상 등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김천교도소를 소개받아 찾아간다. 그 곳에서 재소자들에게 홀치기 기술을 가르쳐 납품받기로 했다. 수출을 전제로 한 계약이었는데 교도소의 생산 일정도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재소자들에게 홀치기 넥타이 기술을 가르칠 남자 기술자가 없는 것이었다. "넥타이 생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여성이어서 남자 기술자를 찾는 게 정말 한강에서 바늘 찾기만큼 힘들었어요." 윤 사장은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장애인 기술자 한 명을 찾아냈다. 그리고 재소자들에게 홀치기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고 바로 생산에 들어갔다. "밀린 수출물량을 대기 위해 밤낮으로 일 해도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품질은 장기복역수들이 만든 넥타이가 좋았던 것 같아요." 윤 사장은 당시 교도소에 라면 등을 특식으로 보냈다면서 추억을 떠올렸다. 홀치기 넥타이는 그럭저럭 재미를 보았으나 사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번은 외주가공업체에서 면실을 쓰지 않고 나일론 실로 묶어서 염색하는 바람에 넥타이를 모두 버려야 할 상황이 벌어졌다. 그냥 버린다면 손실이 너무 클 것 같았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윤 사장은 잘못 염색된 넥타이를 모아 당시 유행하던 '샌드워싱'기법을 활용,약간 흐린듯하면서도 오래된 듯한 색상의 넥타이를 만들었다. 전화위복이라고나 할 까. 이를 본 일본 바이어가 전량 구매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독일에서 수확시기를 놓친 포도로 담근 '아이스 바인'이 달콤한 와인으로 재탄생한 것과 같은 이치였을 거예요." 샌드워싱 기법으로 가공한 넥타이는 삽시간에 동이 날 정도로 팔려나갔다. 지엠인터내셔널은 그렇게 승승장구했다. 잘 나가면 경쟁자가 생기게 마련인가. 홀치기 사업을 시작한지 10년쯤 지난 1989년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한 일본인이 홀치기 넥타이를 특허출원했다는 것이었다. 로열티를 주고 수출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고심끝에 홀치기 넥타이의 일본시장을 포기하기로 했다. 새로운 시장을 뚫기 위해 국내외 시장을 조사하던 어느날 윤 사장은 국내 제일모직의 한 매장에서 눈길을 멈췄다. 재커드로 만든 넥타이 '세나토레'가 지엠이 생산하던 넥타이와 비슷했던 것이었다. 제일모직에 납품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 사장은 바로 '세나토레'와 비슷한 지엠의 넥타이를 들고 제일모직을 찾았다. 회사 관계자는 "정말 한국에서 만든 것이 맞느냐"고 반신반의했다. 처음에는 윗선의 '코드'가 열리지 않아 2백10장밖에 주문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윤 사장은 2백10장의 넥타이를 혼신을 다해 만들었다. 그 결과 세나토레는 물론 제일모직의 브랜드 카디날도 주문을 받을 수 있었다. 제일모직으로의 납품은 신세계 미도파 현대 등 대형 백화점과 대형 할인점 시장으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그 당시가 가장 어려웠다고 윤 사장은 회상했다. 장욱진 기자 sorinag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