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나 이야기에 복사나무 만큼 자주 등장하는 것도 없다고 한다.
발그스레 홍조 띤 탐스런 곡선의 복숭아, 새색시의 수줍은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연분홍 꽃색은 꿈속의 간절한 이상향과 현재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 빠지지 않았던 소재였다.
도연명이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풀어놓은 복사꽃마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속 복사나무숲 경치를 옮겨놓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그렇다.
서유기의 손오공이 바위틈에 갇혀 삼장법사가 구해줄 때까지 5백년동안 견딜수 있게 했던 천도(天桃), 삼천갑자를 산 동방삭이 서왕모의 천도를 훔쳐먹었다는 이야기는 또 어떤가.
현실로 내려와서도 마찬가지.복숭아와 꽃에 대한 비유는 늘 젊은 여자의 고운 얼굴과 자태에 보내는 최고의 찬사였다.
과연 합당한 것일까.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억지로 갖다붙인 것은 아닐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라면 실감하지 못할 터이다.
입으로는 말해도 학교에서 배워 만들어진 이미지일뿐.
그런 의문을 풀어줄 간단한 방법이 있다.
차에 올라 영덕으로 향하는 것.
마법의 문을 열듯 불쑥 그 길에 들어선 다음 되도록 천천히 가속페달을 조절하기만 하면 된다.
아예 차에서 내려 걸으며 마음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안동에서 영덕으로 이어지는 34번 국도변.
매년 봄, 이즈음에 연분홍 복사꽃 세상이 펼쳐진다.
황장재를 넘어서면 절로 탄성이 터진다.
오십천 물길 따라 이어지는 '연분홍 컬러마을'.
도화원기 속 길을 잃고 헤매던 어부의 눈앞에 홀연히 나타난 그 복사꽃세상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할 정도로 눈앞이 아뜩해진다.
무리져 핀 봄꽃은 사람의 마음을 달뜨게 하지만, 이건 숫제 계시를 받고 개안하는 순간의 그 느낌이라 해도 상관없겠다.
길도 알맞게 나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보고, 아래로 파묻히도록 높낮이가 적절하다.
눈과 마음이 닫혔다 열렸다, 내내 이어지는 감성의 물결을 절로 조절해 준다.
신양삼거리에서 옥계계곡쪽으로 이어지는 69번 지방도 주변 역시 연분홍 빛깔로 환하다.
저마다 사진기 셔터를 누르느라 분주하고, 눈을 감고 은은한 향기를 들이키는 여인들의 모습이 싱그럽다.
'…/이 비 그치면/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이수복 '봄비')의 바로 그 정경.
올해는 그 연분홍 꽃이 예년보다 열흘 정도 늦었다.
'영덕대게, 복사꽃축제' 기간중인 15일께가 절정일 것으로 보인다.
이곳이 원래부터 복사골은 아니었다.
논과 밭뿐인 평범한 시골이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이 휩쓸고 가면서 운명처럼 마을의 명패가 바뀌었다.
장비가 없어 쏟아져 내린 토사를 걷어낼 방법을 찾지 못했다.
마을사람들은 생계를 걱정해야 했고, 그런 토질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복사나무를 생각했다.
34번 국도와 7번 국도가 만나는 화개리 부근 주민들이 복사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연분홍 물결은 오십천을 따라 안쪽으로 번져, 지금은 영덕 복사골의 원조처럼 된 지품면으로 확대된 것.
복사꽃 사이를 지나 바다쪽으로 나서면 영덕여행길의 또다른 즐거움을 만난다.
대게의 대명사가 된 영덕대게 요리로 입을 만족시키는 시간.
복사꽃의 연분홍 색깔과 끓이고 쪄 내놓는 대게 등껍질의 발간 색깔이 잘 어울린다.
눈으로도 입으로도 즐거워 싫증나지 않는 '컬러세상'.
푸른 빛 바다를 마주하면 그 봄색깔의 대비가 더욱 도드라진다.
영덕=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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