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홍어'] 혀끝 얼얼한 알싸한 맛…눈물 핑도는 짜릿한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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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흑산도 예리선착장 인근 수협공장 앞 부두.
두터운 해무에 비구름까지 낮게 깔려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바닷물때가 많이 낀 작은 고깃배 영신호와 대광호가 소리없이 미끄러져 들어와 부두에 옆구리를 댄다.
영신호 선원 한 명이 파란색 굵은 호스로 물을 뿌리며 부두 시멘트바닥을 말끔히 치운다.
긴 갈고리로 찍어 올려 노란색 플라스틱 박스에 넘치게 담은 뒤 털퍼덕 털퍼덕 부려놓는 것은 홍어.
비로 인해 사흘 만에 한다는 이 작업의 다음 차례는 홍어의 체급분류.
커다란 전자저울로 한 마리 한 마리 무게를 달아 나누어 놓은 뒤 번호와 마릿수를 쓴 종이조각을 올려놓는다.
"이∼에∼ 1번 다섯마리, 1번 다섯마리."
각기 다른 숫자가 새겨진 모자를 쓴 중매인들의 눈과 손이 잽싸게 움직인다.
작은 나무판에 분필로 휘갈긴 숫자(가격)를 살짝 들어보인 뒤 남이 볼세라 감춘다.
1번 홍어 경매는 순식간에 성사되고, 곧바로 2번 홍어 경매로 들어간다.
영신호 선장 김상열씨의 표정이 밝다.
"일주일 전에는 1백20마리를 잡았어. 이번에는 70마리야. 그래도 오늘 가격이 꽤 좋은데…."
이날 거래된 홍어는 영신호 70마리, 대광호 40여마리 등 1백10여마리.
6㎏ 아래 작은 것에서부터 8㎏이 넘는 '물건'까지 크기도 다양하다.
경매가격은 ㎏당 5만원 안팎.
1시간 만에 끝난 이날 경매에만 수천만원이 오고간 셈이다.
홍어 중의 홍어 '흑산홍어'가 풍년이다.
신안군에 따르면 올들어 4월 초까지의 홍어 어획량은 30t.
5월 말까지 많이 잡히는 시기임을 감안하면 최근 3년새 가장 많은 어획량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흑산홍어는 사실 90년대 말 그 이름이 사라질 뻔했다.
홍어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씨가 말라붙었고, 출어비는 치솟아 1∼2대의 홍어잡이 어선만이 간신히 명맥을 이었던 것.
급기야 군에서 어구대와 유류비를 일부 지원하는 등 홍어살리기운동을 펼쳤다.
다행히 2000년대 들어 주낙에 걸려 올라오는 홍어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홍어잡이 배도 늘어 지금은 7척을 헤아리게 됐다.
15번 중매인 박학준씨는 "홍어가 많이 나니까 돈을 번다. 내년에는 흑산도의 홍어잡이배가 더 늘고 봄철 관광객도 많아질 것"이라며 웃는다.
홍어잡이와 봄철 관광객수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중매인 박씨는 "흑산홍어 맛을 보려는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릴 것이란 얘기가 아니냐"며 반문한다.
사실 흑산홍어는 음력 1∼3월 것을 제일로 쳐준다.
이 시기 알배기 홍어가 많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흑산도를 찾는 이들은 거의 모두 홍어를 맛보기 마련.
홍어는 깨끗한 수건으로 껍질의 끈적한 액체를 닦고 적당한 크기로 썬 다음 항아리에 넣어 삭히는데, 특유의 톡 쏘는 암모니아냄새와 맛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여기에 막걸리를 곁들이는 홍탁, 삶은 돼지고기와 묵은김치를 더한 홍탁삼합을 모르는 술꾼들이 없다.
홍어는 왜 삭혀서 먹을까.
예리항쪽에서 당구장을 경영하는 박종양씨는 "옛날 흑산홍어는 가마니에 싸, 영산강을 통해 뭍으로 보냈는데 그 뱃길 15일동안 자연히 삭았다"며 "삭은 홍어가 해소 천식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두엄에 파묻어 삭히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요즘은 흑산도 주민들도 싱싱한 생물을 즐겨 찾는다고 한다.
15번 중매인 박씨의 안주인 염경순씨는 그 이유로 '홍어의 애(내장)'를 꼽는다.
"홍어 애를 기름소금에 찍어 입안에 넣으면 사르르 녹으며 고소한 맛을 내는데, 삭힌 홍어에서는 그 맛을 볼 수 없다"는게 염씨의 설명.
염씨가 항아리에서 20일 삭힌 것과 삭히지 않은 것 그리고 애를 담아 한 접시 내놓았다.
먼저 삭힌 것 한 점.
혓바닥과 코 안이 약간 싸한 게 말로 듣던 그 맛이다.
막걸리 한잔을 걸치니 그 싸한 맛이 조금 누그러진다.
삭히지 않은 것은 부드러우면서도 차지다.
기름소금을 찍은 애 한 점은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흑산도=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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