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공정거래위원회 출입기자들이 외우다시피 하는 문장이 있다. "출자총액제한제도는 4월말까지 기업들로부터 주식소유 현황자료를 제출받은 뒤 5월중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이를 면밀히 분석해서 결론을 내겠습니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들어 출자총액제한제도(대기업의 타회사 출자를 일정수준 이내로 묶는 규제)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예외 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지난 9일부터 16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강연과 언론사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마다 똑같은 대답이 나왔다. 이같은 '녹음기 재생'은 지난 7일 청와대 업무보고 이후 시작됐다. 강 위원장은 취임 후 출자규제 강화의 필요성을 지론처럼 얘기했고,이날 업무보고에서 이를 공식화했는데 뜻하지 않은 제동에 부딪힌 것.김진표 부총리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정책의 일관성' 등을 이유로 강화에 반대했고 같은 재경부 출신 권오규 청와대 정책수석이 거들었다. 그러자 신광식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가 이의를 제기하는 등 회의장은 삽시간에 과열됐다고 한다. 이같은 분위기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리가 있고서야 가라앉았다. "일단 현 제도를 유지하면서 여러가지 의견을 더 들어보고 경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제고하는 방안을 검토하십시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생겼다. 대통령의 '정리'가 모호했던데다 참석자들의 말이 이날 회의 뒤에도 계속 제각각이어서 정책방향을 가늠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김 부총리는 지난 8일 런던 출국에 앞서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도 출자규제 강화에 반대의견을 분명히 했다. 경제팀장인 부총리가 이러니 강 위원장도 나름대로 생각은 있지만 대놓고 말은 못하고 녹음기 틀어놓은 듯한 말만 하고 있는 것이다. 출자규제 문제는 '투자를 기업자율에 맡기느냐'는 문제 외에도 SK㈜ 사태에서 보듯 국내 그룹들의 경영권 방어와도 직결된 문제다. 앞으로 정책을 어떻게 끌고 가느냐에 따라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작지 않다. 정부가 빨리 입장을 정리해야 기업들도 안정적인 경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중구난방이어서는 시장의 또 다른 불안요인밖에 안된다. 박수진 경제부 정책팀 기자 park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