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합네다." 국경을 넘은 31년 간의 사랑의 드라마 끝에 지난해 12월 베트남인과 결혼에 성공한 최초의 북한여성 리영희(55)씨는 언어와 풍습이 다른 베트남 생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많지만 그래도 행복감을 맛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리씨는 지난 1971년 기술연수차 북한에 온 베트남 유학생 팜응옥카잉(당시 23세)씨와 직장인 흥남비료공장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이후 편지로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다 지난해 북한을 방문한 천득렁 베트남 주석의 간곡한 부탁을 북한이 받아들이면서 31년만에 사랑의 결실을 본 순애보의 주인공. 베트남싸이클연맹의 간부인 남편을 따라 전국싸이클대회 참관차 현재 베트남 중남부지역을 여행 중인 리씨는 정치문제 등 민감한 사안 대신 지난 4개월 동안의 '베트남 시집살이'에 대해서만 털어놓겠다는 조건을 내건 뒤 22일 오후 연합뉴스와의전화인터뷰에 응했다. 다음은 리씨와의 일문일답. -- 현재 어떻게 지내고 있나. 베트남어를 하지 못하다보니 주로 집에서 소일을 하고 지낸다. 집에 셋 우리부부 외에도 80세된 시아버지와 장애인인 시누이 등 모두 4식구가 함께 생활을 한다. 현재 사는 곳은 수도 하노이시의 타이공이라는 지역으로 남편 같은 공무원들이 주로거주하는 곳이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가끔 한인회도서실 등에 나가 소설책을 빌려보기도 한다. 얼마 전 하노이시내를 돌아다니다 한국식당 입구에 '함흥냉면 개시'라는 선전문구를 보고 고향생각이 나 운 적도 있다. 그렇지만 남편이 한국말을 잘하는 편이라 의사소통에는 큰 불편이 없지만 외출시에는 항상 같이 다녀야 하기 때문에 가끔은 미안한 마음도 든다. -- 경제적으로는 어떤가. 대답하기 부끄럽지만 솔직히 넉넉한 편은 아니다. 공무원인 남편의 월급이 미화로 100달러 이하다. 빠듯한 월급을 쪼개 생활을 하다보니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 베트남에는 맞벌이부부가 대부분인데 어려운 가계를 도울 생각은 없는지. 왜 그런 생각이 없겠는가. 하지만 베트남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다보니 그것도여의치 않다. 남편도 이 문제에 관한한 내 의사를 전적으로 존중하는 편이다. 빨리 베트남어를 배워 취업을 하고 싶다. -- 50세가 넘어 결혼을 했는데 혹시 후회는 들지 않는지. (쑥스럽다는 목소리로) 잘 모르겠다. 아직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언어와 풍습이 다르지만 두 사람의 사랑만은 젊은이 못지 않다. 어차피 내가 좋아 한 결혼인데, 남들은 손자 볼 나이에 한 결혼인데... 후회 같은 것은 전혀 없다. -- 북한에는 가족이 있는지. 3살 때 아버지와 친척들이 모두 월남을 하고 북한에는 어머니와 나 그리고 여동생 등 3명이 살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여동생의 핏줄인 조카들이 현재 함흥에 살고 있다. 결혼 후 지금까지 서신교환을 하고 있다. 모 두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이 됐다. -- 북한대사관과는 자주 접촉을 하는지. 북한 국적을 지닌 '공민'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대사관 행사 때면 남편과 함께 빠짐없이 참석하고 교류도 잦은 편이다. -- 결혼 사실이 보도된 이후 한국에는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혹시 한국을 방문하고 싶은 의사가 있는지. (대답하기 곤란한 듯 리씨는 남편에게 대신 대답을 부탁했다) 우리의 결혼 소식이 한국에 전해지면서 그동안 여러 사람들로부터 과분한 격려를 들었다. 하지만 한국 방문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으로셋 한국을 방문해야 할 만한 특별한 이유도 없다. 더구나 아내는 북한국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 방문이 쉽지 않다. 하루빨리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 부부에 대해 관심을 보여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정직하게 살겠다는 말을 하고 싶다. 비록 물질적으로 어렵고, 자식이 없어 외롭더라도 31년만에 사랑을 찾았다는 사실 하나만을 행복으로 알고 남은 인생을 열심히 살고 싶은 생각뿐이다. (하노이=연합뉴스) 김선한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