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오랫동안 계획했던 이라크 전쟁이 사실상 끝났다. 세계 최대 군사 대국인 미국은 국제법을 무시하며 이라크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유엔은 철저히 무시당했으며,무능한 기구로까지 여겨지는 분위기다. 이라크전쟁은 그야말로 '힘의 법칙'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미국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아군과 적군을 구분했다. 미국 편을 들지 않는 국가는 '미국의 적'이라고 말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야만적인 시대를 연상시킨다. 이 같은 침략자의 발언은 어찌 보면 그 반대편에 서 있었던 이라크를 빼닮았다. 종교 근본주의자들처럼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광적인 행동을 감행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호소도 미국을 막지는 못했다. 유일한 강대국인 미국의 도덕적 타락을 지켜보는 지금,우리는 매우 분노하고 있다. 무기력감까지 느낀다. 미국의 행동은 분명 또 다른 광적인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미국은 테러에 대한 동기를 제공했으며,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과연 미국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국가일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값진 교훈을 가르쳐 주었던 참을성 있는 미국은 어디로 갔는가. 유럽에서 불었던 계몽주의 운동을 적극적으로 활용,식민지 시대를 끝내고 모범적인 헌법을 만들어낸 미국이 아니었던가. 언론의 자유를 그토록 부르짖던 미국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미국의 도덕적 타락에 놀라고 있는 사람들은 외국인들만이 아니다. 미국을 사랑하는 많은 미국인들조차 건국 이념의 퇴색과 자국의 오만함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나는 친미주의자다. 하지만 미국의 부당한 행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반대하고자 한다. 미국은 정치·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고 있으며,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있음직한 정보 통제를 실시중이다. 죄 없는 이라크 민간인들에 대한 살상 행위는 너무도 잔혹하다. 미국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는 주체는 반미주의가 아니다. 무장해제된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정권이 강대국 미국을 위협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오염시킨 것은 다름아닌 부시 대통령이다. 국제법과 유엔을 무시하고,미국에 재앙을 가져다 줄 장본인은 바로 부시 대통령 자신이다. 외국인들은 종종 독일인들에게 과연 모국을 자랑스러워하는지 묻는다. 이런 질문에 답하는 일은 정말로 큰 부담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게도 독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사건이 생겼다. 대다수 독일인들이 이라크전을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킨 당사자로서 독일은 역사로부터 큰 교훈을 배웠던 것이다. 지난 1990년 통일 이후 독일은 새로운 주권 국가로 태어났다. 독일 정부는 미국의 유아적인 행동(adolescent behavior)에 대해 동조하지 않고 한발짝 물러나는 용기 있는 태도를 보여줬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요슈카 피셔 외무장관은 국내외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올바른 의지를 관철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감에 빠져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된다. 평화 수호의 외침을 계속해야 한다. 다시 굴러떨어지더라도 산꼭대기로 평화의 돌을 가져다 놓아야 하는 게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 정리=유영석 기자 yooys@hankyung.com -------------------------------------------------------------- ◇이 글은 199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독일의 귄터 그라스가 최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기고한 'The moral decline of a superpower'란 글을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