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의 행정자치부 규칙 개정에 따라 올해부터 '법의 날'은 5월 1일이 아니라 4월 25일에 기념된다. 이 날짜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형식의 법률인 1895년 '재판소 구성법'의 공포·시행일이다. 이러한 법의 날 날짜 변경은,한 나라의 법의 날은 다름 아닌 바로 그 나라의 법적 전통에서 의미 있는 날이어야 한다는 지적을 수용한 것으로 타당한 조치임에 틀림없다. 사실 법의 날을 5월 1일로 제정한 나라는 미국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1958년,공산권국가의 노동절에 대항하기 위하여 미국 변호사협회장의 제창으로 5월 1일이 법의 날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63년 이후 근로자의 날이 5월 1일에서 3월 10일로 변경되고,64년 대한변호사협회의 청원으로 5월 1일이 법의 날로 제정된 바 있다. 그 결과 5월 1일만 되면 노동단체는 노동절 행사를 강행하려 했고,정부는 '5월 1일은 노동절이 아니고 법의 날이며 노동절 집회는 불법'이라 규정하고 관련자를 처벌해 왔다. 이러한 기묘한 상황은 94년부터 근로자의 날이 5월 1일로 환원되면서 해소된 바 있는데,올해부터 법의 날 자체가 4월 25일로 변경되면서 기념일을 둘러싼 분란은 사라지게 되었다. 새삼 이러한 법의 날에 대한 역사를 돌이켜 보는 이유는,한 사회에서 법의 역할과 한계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법의 날이 돌아 올 때마다 우리는 법의 지배 구현,법률과 질서의 준수,준법의식의 고양 등을 강조하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데 과거의 기념일 논란에서 알 수 있듯이,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법률은 준수되기도,집행되기도 힘들며,그 결과 오히려 법률에 대한 경시 풍조만 조장하게 되는 법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의 지배란 실정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형식적 법치(法治)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실정법의 내용이 사회 현실과 시민의 법의식에 부합하고,적용 역시 공정해야 한다는 실질적 법치가 동시에 중요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법의 지배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법 지배의 이러한 복합적 의미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먼저 사상 최초로 법률가 출신이 대통령이 되었으나,아직 우리 사회에는 법치보다는 인치(人治)가 강력히 작동하고 있다. 일반 시민이건 위정자이건 간에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공정한 규칙에 따라 해결책을 찾고 그 결과에 승복하기보다는,'실력자'를 찾아내어 그 사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과거 옛소련에서 법보다는 당 간부에 대한 전화에 보다 의존하였던 이른바 '전화법(電話法)' 현상이 우리 사회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치 의존을 통해 해당 사안에서 신속하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얻을 수는 있겠으나,법 자체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고 법의 효율성을 떨어뜨려 결국 모두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인맥을 찾을 수 없는 사회적 약자의 권익은 외면되기 마련이며,분쟁의 공정한 해결은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치적 문화와 관행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다. 한편 이와 동시에 실정법의 합법성 외에 그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합법성은 정의로운 법의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법률은 개인 사회 국가의 법익에 대한 침해,사인간(私人間)의 분쟁 등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다. 그런데 그 법률의 내용에,현실에 부합하지 않거나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가 들어 있다면 분쟁은 제대로 해결될 수 없고 질서는 유지될 수 없다. 그리고 비(非)법률적 방식으로 분쟁해결과 질서유지가 가능한데도 법률을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하는 경향 역시 사라져야 한다. 요컨대,자기반성과 혁신의 메커니즘을 갖춘 법만이 분쟁해결과 질서유지 도구로서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기념일자를 갖게 된 '법의 날'을 축하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법이 현실의 변화를 신속히 그리고 제대로 반영할 것을,그리고 사람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사회운영원리가 안착되기를 다시금 희망한다. kukcho@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