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냈다] 윤영달 크라운베이커리 사장 (1) 외환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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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강남역 3번 출구에서 뱅뱅사거리 방향으로 2백m쯤 가다보면 산학협동빌딩이 나온다.
지난해 11월 4년9개월만에 화의를 졸업하고 업계 매출 2위로 다시 부상한 크라운베이커리가 입주해 있는 건물이다.
윤영달 사장(59) 사무실은 그 건물 17층에 있었다.
10여평 공간에 잘 정돈된 컴퓨터와 LCD모니터,대형 프로젝션TV….
그중 책상 위에 놓인 빛바랜 구식 서류파일이 눈길을 끌었다.
"사사(社史)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서류입니다."
공개하기 챙피해서일까.
껄껄 웃으면서 그가 보여주는 파일에는 채권단에 제출했던 경영권 포기각서가 말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지난 날과 같은 실수를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보관하고 있지요."
윤 사장은 파일을 보면서 화의 당시 일들을 하나둘 회고했다.
외환위기 전 1996년 당시 크라운 베이커리는 업계 매출 1위로 '잘 나가는'회사였다.
국내 최초로 개발한 1백% 우유 생크림케이크가 돌풍을 일으켜 한달에 20만개,금액으로 최대 30억원어치씩 팔려 나갔다.
'가맹점을 더 내달라'는 요구가 잇따랐고 전국 6백여 매장에서 주문이 쏟아져 밤을 새워 케이크를 만들어야할 정도였다.
매출은 연 25%나 성장해 그 해 9백60억원의 매출에 11억원의 이익을 올렸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다고 했던가.
외환위기를 전후해 고정 투자비에 대한 부담이 늘기 시작했다.
"밀가루 설탕 등 원부자재 가격이 한달새 30∼40%씩 폭등했습니다.하지만 소비자와 가맹점에 공급하는 생지가격을 올릴 수가 없었어요."(김선태 재경부장)
신선한 빵을 공급하기 위해 전국 거점에 물류시스템과 지방공장을 건설하면서 조달했던 자금이 큰 짐으로 작용한 것이다.
물류,공장 건설에는 3백30억원이 들어간 상태였다.
급기야 금융권으로부터 단기차입금에 대한 상환독촉이 들어왔다.
대출금리를 30%나 달라고 했고 지급보증료는 0.3%에서 3%로 10배나 폭등했다.
"연리 15%로 3개월씩 연장하던 제2금융권 대출이 98년초에는 1개월,1주일,3일 단위로 좁혀왔지요."
윤 사장은 당시를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크라운베이커리는 그의 선친인 윤태현씨(99년 작고)가 1947년 창업했다.
영일당제과로 시작해 1956년 ㈜크라운제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88년 생과사업부가 별도 분리되면서 지금의 크라운 베이커리가 탄생했다.
'아버님이 일궈놓은 전통과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날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윤 사장은 기가 막혔다고 한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보내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거래은행인 외환은행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5억6천만원짜리 어음이 들어왔습니다."
당장 결제하기 힘든 자금이었다.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재경담당 이사를 긴급 호출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