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회사가 고객의 돈을 내주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자영업자 최모씨(44)는 대그룹 계열 A증권사에 돈을 찾으러 갔다 다시 허탕을 쳤다. "머니마켓펀드(MMF)에 들어 있는 카드사 채권이 팔리지 않아 돈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라는 증권사 직원의 말을 듣고 그는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증권사 창구에는 요즘도 MMF 인출을 놓고 고객과 직원간의 입씨름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카드채 위기 등으로 MMF의 대량 환매사태가 터진 지 한달 보름이 지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한다. 고객은 고객대로 지쳐 있고,증권사는 스스로 신뢰를 갉아먹고 있는 형편이다. 한 증권사 임원은 "MMF 환매연기로 인해 증권사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으며 종합자산관리회사로 변신하려는 노력마저 물거품이 될 것 같다"며 걱정했다. 증권사들이 최근 의욕적으로 내놓은 신종 금융상품인 주가연계증권(ELS)의 판매실적이 목표치의 23%에 그친 것도 금융회사로서의 신뢰가 무너진 탓이 크다. 증권사가 고객의 돈을 제때 돌려주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가장 큰 근본원인은 카드사의 경영위기다. 카드채가 '부실채권'으로 전락하고 거래가 실종된 때문이다. 방만한 확장 경영에 매달리면서 리스크관리에는 소홀히 한 카드사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지적이다. 증권사들은 이번 환매연기의 책임을 카드사로 몰아세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과연 증권·투신사는 선의의 피해자일까. MMF를 판매하는 증권사들은 MMF의 제시 수익률을 높이라고 투신사에 강요했다. 투신사들이 금리가 다소 높은 카드채를 집중 사들인 것도 이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투신사들은 카드사와 짜고 3개월인 기업어음(CP) 만기를 1년 이상 자동 연장되도록 이면계약을 맺었다. 총10조원에 이르는 '옵션CP'는 투신사와 카드사의 공동작품인 셈이다. 한 투신사 임원은 "카드사의 경영부실이 MMF 환매연기의 주범이라면 증권·투신사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는 종범"이라고 털어놨다. 장진모 증권부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