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엑스아쿠아리움은 4일과 5일 오전 11시, 오후 3시와 4시 '난 물속에서 찍혔다'란 이색이벤트를 벌인다.
수족관의 다이버들이 수십 마리의 상어가 노니는 오션탱크에 들어가 수족밖에서 구경하는 어린이들의 사진을 찍어준다.
물속에서 바깥을 향해 찍은 자신의 사진을 확인해보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02)6002-6230, www.coexaqua.co.kr
한국 미술 세계화를 이끈 거장으로 저술가이자 음악 연출가다.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손에 손잡고’ ‘다다익선’ 등 걸작들을 발표하며 한국 미술의 세계화에 힘썼다. 대표작으로는 1984년 새해 첫날 전 세계에 동시 송출된 최초의 인공위성 TV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있다.(정답은 하단에) 티켓 이벤트 : 한경arte필하모닉한경arte필하모닉 ‘더클래식2025 시리즈1’이 오는 1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홍석천이 지휘하며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3번을 연주한다. 5일까지 아르떼 사이트에서 신청하면 된다. 5명을 뽑아 R석을 두 장씩 준다. 당첨자 발표는 6일.arte.co.kr에서 각종 이벤트에 응모할 수 있습니다.(예술인QUIZ 정답은 백남준) 꼭 읽어야 할 칼럼● 원조 노스페라투F.W. 무르나우 감독의 ‘노스페라투’(1922)는 최초의 드라큘라 영화로, 독일 표현주의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작년 로버트 에거스 감독이 이를 리메이크하며 사회적 불안과 공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선과 악, 낮과 밤이 교차하는 강렬한 이미지와 시대적 메시지는 100여 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하다. - 영화평론가 허남웅의 ‘씨네마틱 유로버스’● 속도를 그린 화가라바스는 20세기 현대 문명의 혁신과 속도를 예술로 표현한 화가로, 기술과 움직임을 주요 주제로 삼았다. ‘최초의 소비에트 비행선’ 등에서 그는 기계의 속도와 역동성을 감각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작품은 단순화된 형태와 흐릿한 윤곽을 통해 변화하는 사회 속 움직임과 에너지를 예술적으로 담아냈다. - 에세이스트·번역가 서정의 ‘어쩌면 나만 아는 명작들’&nbs
미국 팝스타 비욘세(사진)가 생애 처음으로 그래미상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다. 그래미상 후보 지명 아흔아홉 차례, 올해의 앨범 후보 지명 다섯 차례 끝에 테일러 스위프트, 빌리 아일리시 등 유력한 경쟁자를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2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크립토닷컴아레나에서 열린 ‘제67회 그래미상’에서 비욘세는 정규 8집 앨범인 ‘카우보이 카터’로 올해의 앨범 상을 받았다. 그래미상은 미국 레코딩아카데미가 주최하는 대중음악 최대 규모 시상식이다. 94개 부문에 상을 준다. 최근 5년 이내 곡 발매 이력이 있고 12곡 이상을 발표한 사람만 심사가 가능하다 보니 보수적인 평가를 내리는 시상식으로 유명하다. 대상 격인 올해의 앨범에서 흑인 여성 수상자가 나온 건 1999년 로린 힐 이후 26년 만이다.비욘세는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서른두 차례 수상해 역대 최다 그래미상 수상 기록을 갖고 있지만 올해의 앨범과는 연이 없었다. 앞서 네 차례 이 부문 수상 후보에 올랐지만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올해는 달랐다.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많은 앨범 판매액을 올렸던 테일러 스위프트, 이번 행사에서 신인상을 받은 채플 론, 2020년 올해의 앨범 수상자인 빌리 아일리시 등을 제쳤다. 지난해 3월 낸 앨범인 ‘카우보이 카터’가 컨트리, R&B, 어쿠스틱팝 등의 장르를 버무려 음악 간 경계를 허물면서도 다양성을 살렸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비욘세는 수상 소감으로 “이 상을 린다 마텔에게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마텔은 컨트리 장르 음악에서 최초로 성공한 흑인 여성으로 평가받는 1941년생 아티스트로 이번 비욘세 앨범을 함께 작업했다. 비욘세
이상만(사진)은 1948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1세대 유학파 발레리노다. 안무가, 연출가로서 능력과 자질을 갖춘 그는 한양대 무용학과로 편입해 국내 발레리노로는 처음 무용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발레단 창단 멤버로 공연에 두루 출연하며 주역 무용수로 떠올라 국내 최고 발레리노라는 찬사를 받았다.이상만은 해외 여러 나라에 자신의 비디오를 보내 영상 오디션을 한 첫 인물로도 꼽힌다. 연락이 온 건 미국에 있는 내셔널아카데미오브아트라는 예술학교였다. 이상만은 졸업 후 미국 내셔널 발레 일리노이에 입단했다. 국립발레단 남성 무용수 중 최초로 외국 발레단에 진출한 사례로 기록됐다. 1985년 한국적 발레를 선보이겠다며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성을 딴 ‘리 발레단’을 창단해 10여 년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공연했다.2013년 림프암으로 투병하던 때도 창작 발레 ‘무상’(vanity)을 선보였다. 이듬해인 2014년 작고했다.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