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살림살이를 책임진 기획예산처가 요즘 잇단 '숙제'로 바빠졌다. 경기를 떠받치기 위한 추가경정예산 편성 작업을 서둘러야 하고, 주공.토공 합병작업 백지화 등으로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작업도 재정비해야 한다. 눈덩이처럼 부실 규모가 커지고 있는 국민연금 등 4대연금을 개혁하는 일도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 대담 = 이학영 경제부장 ] ----------------------------------------------------------------- -정부가 그동안의 낙관론을 접고 경기부양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키로 했습니다.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달 초에 올 성장률 전망치를 4%대 초반으로 낮추었는데도 정부는 5%대 달성을 낙관하는 등 경제를 너무 안일하게 봤던 것 아닙니까. "국내 기관들은 성장률을 낮춰 전망했지만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해외 기관들은 올해 한국이 5%대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는 등 시각차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라크전쟁 개전이 늦어져 세계 경제 회복이 지연되고 있는데다 사스(SARS.급성 중증호흡기증후군) 등 예기치 못한 복병들까지 겹쳐 경기부양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된 겁니다." -추경예산 규모는 어느 정도로 계획하고 있습니까. "아직 구체적으로 정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업이 필요한지 각 부처별로 내역을 받아 전체 규모를 결정해야지요." -재정경제부는 확실한 경기부양 효과를 위해 최소한 4조∼6조원은 편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고 하던데요. "확실하지 않은 얘기입니다. '선(先)소요예산 취합, 후(後)규모 결정'의 절차가 필요한데, 미리 규모부터 정해 놓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세계잉여금 등 현재 동원할 수 있는 추가 재원은 2조3천억원에 불과합니다. 이 규모 이상으로 추경을 짜려면 적자재정이 불가피한데,균형재정을 추구하는 예산 주무장관으로서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재정에 일시적 부족분이 발생하겠지만, 3년 단위로 중기재정계획을 편성키로 한 만큼 재정건전성을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추경을 주로 어떤 분야에 투입할 계획입니까. "추경은 단기간 내에 경기부양 효과를 봐야 하므로 올해 안에 집행될 수 있는 사업을 찾아 그곳에 집중할 것입니다. 사회간접자본(SOC) 분야는 투자 결정에서 집행까지 걸리는 시간이 많은 만큼 올해 안에 집행될 수 있을지 검증작업이 필요합니다." -정부가 철도청 민영화계획을 포기한데 이어 최근 주택공사와 토지공사 합병계획마저 백지화했습니다. 전력산업 민영화도 표류하고 있고…. 대외적으로 공표까지 한 공기업 개혁 의지가 퇴색하고 있는데 대해 비판이 적지 않습니다. "사회적 논란이 있는 문제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포스코 KT KT&G(옛 담배인삼공사) 등 대부분 공기업들은 이미 민영화를 완료했습니다만, 전력 가스 등 공공성이 요구되는 망(網)산업 분야는 민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장점과 단점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공.토공 통합을 백지화하기로 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공공성이 그다지 크지도 않은데. "정부로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두 회사를 통합하기 위한 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는데, 대다수 국회의원들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백지화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어요. 예산처 차관시절부터 국회의원들을 일 대 일로 만나 설득해봤습니다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국회 반대로 어차피 안 될 일이라면 빨리 결론을 내리는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는게 정부의 정책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일 아니겠습니까." -포스코 등 민영화된 공기업의 지배구조에 정부가 문제를 제기해 최고경영자가 바뀌기도 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봅니까. "민영화된 공기업들의 사장 선임에 사내 임원들이 영향력을 많이 발휘해 왔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회사 출신이 유리하게 돼 있다는게 문제입니다. 사외이사 등 외부 전문가를 중심으로 사장 추천위원회를 구성해 진정한 의미의 민영화가 이뤄지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과 공무원.군인.사학연금 등 4대연금의 부실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적게 걷고 많이 내주는 제도적 문제로 인해 이들 연금의 책임준비금 부족액이 작년 말 현재 3백40조원에 이릅니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5백96조원)의 57%가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4대연금 모두 적정부담.적정급여 체계로 바꾸는 일이 불가피합니다. 특히 국민연금 부실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에서 민.관 전문가가 참여하는 '국민연금발전위원회'를 발족시켜 개혁방안을 마련 중입니다만, 전반적인 재정안정화가 시급합니다." -복지부가 맡고 있는 국민연금의 기금운영권을 예산처 등 다른 부처로 이관하는 방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국민연금의 적립금이 작년 말 93조원에서 올해는 1백12조원으로 늘고, 2020년에는 5백17조원으로 불어날 전망이어서 관리를 보다 효율화할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제도운영과 자산운용 기능을 분리한다는데 정부 내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자산운용은 특정 부처에 소속되지 않고, 경제.금융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별도의 기구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고 해나가도록 할 계획입니다." -별도의 자산운용회사를 만들겠다는 얘기입니까. "외국의 투자청과 같이 별도의 회사를 만들 수도 있고, 외부에 자산관리를 위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전문가들과 협의를 거쳐 결정될 것입니다." -최근 경기 위축의 요인으로 꼽히는 기업 투자 부진은 정부 정책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기업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불확실성'입니다. 그런 면에서 정부는 주요 정책 현안에 대해 신속히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주5일 근무제 등 노동관련 현안에 대해서도 되도록 빨리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