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비사 시인 신동엽(하) 문학평론가 김우창은 신동엽의 시 "금강"에 대해 "오늘날의 상황에 대응하는 과거"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시인은 이 시에서 연민을 느끼는 데 주저앉아 버리지 않고 연민의 근원을 생각하고 연민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불의에 대하여 맹렬한 분노를 폭발시키며,동학이야기에서 오늘날의 상황에 대응하는 과거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금강'의 '서화'에서 시인은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1960년 4월/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짱을 찢고/영원의 얼굴을 보았다'라고 자유에 대한 뜨거운 갈망을 새겨놓는다. 동학혁명과 겹쳐 떠오르는 이 4월혁명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민중의 염원은 다름아니라 인간 본연의 삶,민족 고유의 신명과 덕성이 어우러진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시에 나오는 '맑은 하늘'이 표상하는 것은 바로 외세의 짓누름으로부터 벗어난 우리 민족의 자주적이면서도 주체적인 삶이다. 그것은 이미 '껍데기는 가라'에서 노래한 바 있는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아사달 아사녀'의 삶이기도 하다. '금강'은 역사성과 서사적 골격을 갖추고 있으며 또 시인 스스로 서사시라고 밝히지만 이야기가 있다는 점을 빼놓고는 서정시를 길게 늘여놓은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김주연은 '금강'을 평하면서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대한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인 묘사가 결여되어 있으며 유기적 관련성 없이 작가의 주관이나 감정이 불쑥불쑥 끼여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문제점을 안게 된 것은 역사 의식이나 지식의 뒷받침 없이 시작(詩作)에 임했기 때문이라고 본 그는 '금강'이 "역사를 상대하면서도 역사가 시적 대상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김우창 역시 '금강'이 "우리의 현실에 대하여 질문하여 마지않는 뜨거운 관심으로 역사를 용해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연속적인 역사적 현실로 이해하게" 만든다고 말하면서도 "역사적 사고가 얕고 단순화된" 면을 지적한다. '금강'은 당대의 뛰어난 시적 업적으로 평가받지만 한편으로는 체념주의와 허무주의,토속적인 샤머니즘에 근거한 운명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작품이다. 1968년 신동엽은 장편 서사시 '임진강'의 집필을 계획하고 자료 준비를 위해 임진강변의 문산 등을 답사하지만 그 계획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는 대신에 전5집으로 구성된 오페레타 '석가탑'을 써서 드라마센터 무대에 올린다. 같은 해 6월16일 김수영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지자 그는 깊은 슬픔에 빠진다. 김수영의 갑작스런 죽음을 몹시 슬퍼한 그도 이듬해인 1969년 4월7일, 간암 선고를 받은 지 불과 한 달 만에 서울 성북구 집에서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뒤 미처 활자화되지 못한 유작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조국''영影''서울' 등이 '고대문화''월간문학''현대문학''상황' 등에 발표된다. 1970년에는 '사상계'와 '창작과 비평'에 '좋은 언어''봄의 소식''강''살덩이''만지(蠻地)의 음악' 등이 실리고 부여읍 군수리 나성터 금강 기슭에 그의 시업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진다. 197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신동엽 전집'이 나온 이래 79년 선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83년 '신동엽―그의 삶과 문학', 84년 '껍데기는 가라―신동엽 평전·시선집', 89년 시집 '금강'이 잇달아 간행된다. 역사 의식과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자주와 해방을 알기 쉬운 언어로 노래한 민족 시인 신동엽에 대한 관심과 호응은 그가 숨진 뒤 오히려 높아진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