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로드맵(road map)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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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후반 '어떻게 하면 일본을 따라잡을까'라는 문제가 제기됐을 때,누군가 "일본이 가는 길을 따라만 가는데 어떻게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이 반문이 바로 정답이었는지도 모른다.
90년대 후반 정보기술(IT) 붐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경로를 발견했다는 말도 나왔다.
보는 시각에 따라 이 역시 대일본 콤플렉스의 반사적 표현 아니냐는 지적도 있고,실제로 그런 것인지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로를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다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로의존성'이란 용어가 자주 들린다.
하나의 경로가 정해지거나 여기에 익숙해지면 다른 경로로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를 '고착효과'라고도 한다.
경로의존성은 물론 시장선점(표준)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성공에 도취되거나 기존 경로에 안주하다가는 당할 수 있다는 메시지도 던진다.
새로운 경로를 개척하려는 도전자는 언제든 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게 있다.
참여정부 들어 유달리 많이 사용하는 외래어의 하나인 로드맵(이정표)이 그것이다.
로드맵은 사실 국민의 정부 마지막 해에도 유행했다.
산자부는 업종별 산업기술 로드맵을,과기부는 국가기술 로드맵을 만든다고 부산했다.
그리고 언론에 신나게(?) 홍보했다.
지금 각 부처는 이를 활용,참여정부의 '선택과 집중'전략을 마련하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정부의 로드맵은 일단 작성되면 그걸로 운명이 다 된 건지도 모른다.
작성과정에서 참여자들이 인식과 정보를 공유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기초적이고 공통적인 것에서 정부가 할 일을 찾았다면 성공이다.
사실 어떤 환경과 변수에도 불구하고 인공위성을 쏘아올려야 한다는 식의 임무지향적(mission-oriented) 로드맵이면 모르겠지만,상업적 시장의 수요를 겨냥한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기업의 계산법이 정부와 다르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경쟁이 치열할수록,기술과 시장이 급변하거나 불확실할수록 로드맵도 천차만별일 수 있다.
한국산 D램 반도체에 대한 보조금 지급여부와 관련해 미국 상무부 실사단의 월권행위에 가까운 기업정보 요구로 시비가 일었던 탓인지,마이크론의 한국법인 설립 움직임도 정보수집 차원 아니냐는 얘기가 있다.
만약 차세대 반도체 로드맵도 정보수집 대상이라면 이미 공개된 정부의 로드맵이 아닐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로드맵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부처가 있다.
정부 주도의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상용화라는 성공적 경로를 만들어 낸 바 있는 정통부다.
그 정통부가 지금 3세대 IMT-2000 서비스 로드맵 때문에 고민이다.
기업은 이미 결정된 로드맵을 따라가도록 돼 있지만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기술·시장·투자환경이 달라졌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러는 사이 다른 한쪽에선 휴대인터넷 유·무선통합서비스 등 새로운 흐름에 맞는 로드맵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정통부의 수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환경이 변하면 로드맵도 변해야 하는데,어느새 그럴 수 없는 '로드맵의 함정'에 빠져버린 건 아닐까.
기술 진화는 수많은 봉우리로 점철된 지형의 탐색과정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지형이 변하기까지 한다면 어떻게 될까.
봉우리 하나를 찾는 것은 쉽다.
더 오를 수 없을 때까지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더 높은 봉우리를 찾아 언제든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다양한 경로를 찾아나서는 이가 많을수록 유리한 국면에서는 정말이지 '정부 주도의 봉우리 찾기'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안현실 논설ㆍ전문위원 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