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이 만들고 대기업이 조립한다' 일본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사례는 세계 어느 국가보다 돈독하며 끈끈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선진국들의 경우 일방적인 하청이나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관계가 일반적인데 비해 일본에서는 장기 생존을 위한 파트너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일본이 전후의 피폐한 상황을 딛고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된 원동력으로 독특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사례를 꼽는다. '계열화 시스템'이라는 명칭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협력모델은 자동차와 가전산업을 세계 정상급 수준으로 끌어올린 밑바탕이 됐다. 계열화 시스템은 일본의 자동차 업계를 중심으로 보편화됐다. 각종 부품과 재료 개발에 완성차 대기업과 협력업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중소기업들은 단순 납품이 아니라 개발에서 생산까지 완성차 대기업의 기획회의에 직접 참여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한다. 완성차 대기업은 협력업체에 적극적으로 개발자금와 기술을 지원한다. 1,2,3차 부품기업과 자재공급기업 등 중소기업들은 기획단계에서부터 스스로의 권한을 가지고 협력한다는 점에서 아웃소싱과는 개념이 다르다. 대부분의 완성차 업체들이 협력업체의 지분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고 재고 관리,자금 지원,각종 컨설팅을 병행한다. 계열화시스템은 가전제품과 PC,각종 산업장비 등 다품종 소량부품을 사용하고 있는 분야로 급속히 확대됐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부품 개발에 들어가는 인력과 시간,비용을 줄일 수 있고 중소기업들은 전문화를 통해 완성제품의 품질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 일본의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높은 협력도는 일본의 자동차 및 가전제품의 내제율(內製率·제품 완성 공정에서 재료 및 부품의 독자적인 자급정도)이 불과 31%선에 그치고 있는 점이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 비율이 낮다는 것은 그만틈 외부 조달이 많다는 의미다. 31%의 경우엔 완성제품 들어가는 부품과 자재의 3분의 2가 협력관계에 있는 중소기업에서 제작된다는 얘기다. 미국 및 한국 등의 동종업계 내제율(60∼70%선)과 비교하면 큰 차이를 보인다. 1990년대 들어 일본에서는 대기업의 중소기업 의존도는 더욱 커져 생산,제조부문을 아예 외부기업에 하청하는 사례까지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제조기업인 NEC의 경우 제조부문 인력이 30%에 머무르고 있다. 중소기업연구원의 송장준 박사는 "일본의 계열화 시스템은 협력업체들을 파트너로 인정하는 대기업 CEO들의 인식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도 최근들어 대기업들이 잇달아 중국과 동남아 등지로 공장을 옮기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협력 시스템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도요타와 혼다,NEC,소니 등 일본의 대기업들과 수직화돼 있는 중소기업들이 아직도 일본 산업의 기본 토대로건재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