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ㆍ중기 '윈 윈'] 이제는 '부부관계'…일류제품 낳는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기업간 거래에서 한때는 대기업을 모기업(母企業)이라고 불렀다.
대기업이 모기업이라면 중소기업은 자기업(子企業)이라고 불렀을까.
그렇지 않았다.
중소기업은 하청(下請)기업이라고 했다.
명령을 내리는 대로 따라해야 하는 그런 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청기업이란 용어는 일본식이라고 해서 80년대 들어 중소기업계열화촉진법을 개정하면서 수급기업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어 기업간협력증진법이 생기면서 대기업을 위탁기업이라고 부르고 중소기업은 수탁기업으로 또 개명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도 당초엔 '종속관계'였다.
그 다음엔 공존관계 동반자관계 협력관계 상생관계 등으로 변모해 왔다.
최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계를 '부부관계'라고 선언했다.
이 회장은 지금까지 하청인이던 중소기업들을 '아내' 위치로 승격시켜 주었다.
그런데 삼성그룹은 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를 부부관계라고 선언했을까.
그 내면을 여기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 삼성그룹은 약 52만5천가지의 부품을 중소기업에서 조달해 쓴다.
부품 및 원자재 구매액도 이미 5조원을 넘어섰다.
원가의 약 55%를 중소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중소기업 부품이 세계 최고가 돼야 삼성제품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삼성은 중소기업을 '아내'로 격상시킨 것이다.
삼성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 LG SK 등도 비슷한 상황이다.
자동차엔 2만개의 부품이 들어가고 VCR엔 9백개, 컬러TV엔 5백개의 부품이 들어간다.
이같은 제품들이 대기업의 브랜드로 출하되지만 그 속을 들어다보면 한결같이 중소기업으로 꽉차 있다.
중소기업의 위상이 '아내'로 승격되자 중소기업들도 차츰 바가지를 긁기 시작했다.
그 불만의 소리는 크게 4가지로 집약된다.
△납품단가 인상 △연간 물량배정 △납품대금 현금지급 △공동기술 개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아내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남편'이 갑자기 어떤 횡포를 부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량품을 핑계로 거래를 갑자기 중단시킬까봐 두려워한다.
끊임없는 납품단가 인하 요구에 밤잠을 설친다.
자신에게 주던 물량을 느닷없이 '다른 여자'에게 주는 것을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더욱이 지금까지 중소기업은 부품만 납품했지 자기의 브랜드는 없었다.
그러나 중소기업의 발언권이 높아지면서 대기업과의 공동마케팅을 통해 자기브랜드를 유지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얼마전 LG텔레콤과 단말기 제조업체인 어필텔레콤간의 전략적 제휴가 그런 케이스다.
광역 무선호출기 어필시리즈로 무선호출기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가진 어필텔레콤은 어필 PCS와 LG텔레콤의 브랜드인 LG019를 동시에 부착하는 공동마케팅을 펼쳤다.
덕분에 LG텔레콤은 단말기를 독점 판매해 고객을 유치하고 수익도 올렸다.
어필텔레콤은 마케팅 경험부족에 따른 손실을 최소화했다.
완제품을 만들어 대기업 브랜드로 공동마케팅을 벌이는 기업도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마케팅을 대기업에 의존하는 것은 식품 생활용품 전자제품 등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계 등 중공업분야에서도 공동마케팅이 늘어나는 추세다.
진영정기는 방전가공기와 연삭기를 현대정공에 납품 판매한다.
대구중공업도 소형 선반을 현대정공을 통해 판다.
광주 남선선반은 범용선반을 기아중공업을 통해 판매한다.
봉신중기는 밀링머신을, 금창정밀은 NC밀링을 각각 기아중공업을 통해 납품해 기아 브랜드로 판매한다.
이밖에 유일기계공업은 평면연삭기를 화천기계에 납품 판매한다.
영창기공과 아세아기공 한국화낙 등도 화천기계와 공동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부부관계'는 기술제휴에서도 두드러지고 있다.
HSD엔진과 광희주물제작소는 실린더 라이너 개발을 위해 기술제휴를 했다.
삼성전자와 이랜텍은 배터리팩을 공동으로 국산화했다.
두산과 지니텍은 서로 손을 잡고 반도체 장비를 개발했다.
포스코와 범우화학공업은 고속냉간압연유 개발을 공동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이제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부부 사이에서 서로 코드가 맞지 않으면 우수한 제품을 생산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일모직은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견적 계약 발주 생산 납품 지급 등을 온라인 EDI(Electronic Data Interchange) 시스템으로 구축했다.
이 회사는 협력 중소기업과 온라인을 통해 이미 작업사양서 원.부자재 대금결제 주문분야 판매실적 등 다양한 정보도 제공한다.
LG전자는 'FRIEND 2005'란 운동을 통해 2백여개에 달하는 협력업체와 동반자 관계를 구축중이다.
이는 컴퓨터망으로 부품조달과 관련된 각종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 기업들이 국제 경쟁력을 갖추려면 '부부사이'인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화목해야 한다.
앞으론 불량품을 납품하면 남편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된다.
대기업도 외상으로 부품을 공급받지 말고 현금을 주고 받아야 상생할 수 있다.
그래야 서로 힘을 합쳐 세계 최고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이치구 전문기자 rh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