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洸 < 한국외대 교수·前 보건복지부장관 > 두산중공업 철도 화물연대 파업 등 요즘 일어나고 있는 노사관계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나라 경제의 앞날이 걱정된다. 걸핏하면 머리띠 두른채 생산현장을 마비시키는 관행 아닌 관행이 계속되니 나라 경제는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80년대 중반 이래 20여년 계속돼온 '대립'과 '갈등'의 노사관계는,역대 정부 중 가장 친노동적인 참여정부가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되기는커녕 현안들이 누적돼가고 있다. 국가경제가 함몰될 지경인데도 뚜렷한 원칙·설득력 있는 방책없이 미봉책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노사 갈등과 그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지켜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노동의 본질에 대한 이해나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직업으로서의 노동에는 첫째 생계수단으로서의 노동, 둘째 자아실현수단으로서의 노동 등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모든 근로자는 노동을 통해 보다 높은 소득을 올리려 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런데 노동의 이 두 가지 측면과 의미의 본질이 현실의 노사관계에서 강조되기는커녕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 먼저,생계수단으로서의 노동을 보자.모든 노동자가 생계를 위해 보다 많은 소득을 바란다. 노동자들이 사용자와 협상을 더 잘하고,파업이라는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니다. 그러면 더 많은 소득을 위해 근로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소득은 남에게 무언가를 베푼 것에 대한 보상,또는 생산활동 참여에 대한 대가다. 그러므로 소득을 많이 올리려는 사람은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장 잘 충족시켜 주는 사람,또는 생산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다. 따라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이 나라 노동자들의 소득수준이 높아지기를 바란다면 조합원들이 생산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기업에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음,자아실현수단으로서의 노동을 보자.우리들은 흔히 미국 유럽 등의 선진국민들이 일하는 것 보다 더 많이 노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기독교 사상의 서구인들은 '노동이나 직업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소명'으로 인식하고 있다. 노동이 종교적 구원을 성취하는 길이기에 사람들은 노동을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할 수가 없다. 20세기에 들어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이웃 일본의 경우도 노동에 대한 인식은 남다르다. 역사 의식이 있는 선각자들이 사명감을 갖고 가르치고,그 가르침을 받은 후손들이 힘 모아 이루어낸 나라가 오늘의 일본이다. 이 같은 일본의 노동관에 대해서는 이시다 바이간(石田海岩,1685∼1744)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바이간의 사상은 "돈보다 귀중한 것이 자기완성이고,노동은 곧 정신수양으로 자기완성에 도달하는 첩경"이라고 했다. 즉 일 자체가 수양이고,일하는 것이 도를 닦는 것이니,설사 이익이 없더라도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노동관이든 바이간의 노동관이든 노동을 '천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이에 따라 근면에 의해 소득을 올리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나라의 근로자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그리고 많이 일하는' 근면성으로 세계의 칭송을 받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더 많은 소득을 올리려 하며,자기완성의 근로의식은 종적을 감추었다. 우리 모두 잘 먹고 보람있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잘 먹기 위한 더 많은 소득은 근로자가 자신의 기술을 향상시키고,더 많은 일을 함으로써만 가능해진다. 보람있게 살기 위해서는 일이 보람있어야 하며,노동자체가 자아실현의 길이라 인식될 때 가능하다. 우리의 노사관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노든 사든, 그리고 정책당국이든 생계수단으로서의 노동 의미와,자아실현 수단으로서의 노동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의 근로의식·노동철학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는 한 현재의 중진국에서 선진국 진입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노동철학의 기초부터 다지는 작업이 필요하다. choik01@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