팸 브레차씨(37)는 전업 주부다. 그는 작년까지만 해도 거대 에너지기업 엔론에서 컴퓨터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그러나 회계부정 사건으로 회사가 파산해 직장을 잃었다. 지금은 막내딸 사라가 다니는 무어초등학교에서 경제교사로 변신했다. 무보수 자원봉사이지만 보람이 넘친다. 브레차씨는 "사회적으로 책임을 다하는 기업을 많이 양산하는 첫걸음은 바로 소비자교육"이라고 강조했다. 소비자가 상품을 고를 때 기업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어야 국가 경제 전체가 튼튼해진다는게 그의 지론. 무어초등학교 4학년(만 10세) 학생들은 그녀로부터 어떠한 소비자 교육을 받을까? 오늘의 주제는 '원산지 표시'. 22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교실을 들여다봤다. 브레차씨는 한 보따리의 상품들을 풀어놓으면서 40분간으로 예정된 수업을 시작했다. 책상 위에 초콜릿 사탕 전등 만년필 인형 오렌지 게임기 통조림 등 수십가지 상품들을 쏟아놓았다.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원산지 표시에 대해 배워 보기로 해요. 여러분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많이 가져왔어요.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한테는 수업이 끝난 뒤 선물을 줄 거예요." 선물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술렁거리던 학생들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브레차씨는 대형 미국 지도를 칠판에 붙였다. 형형색색으로 각 주를 구분해 놓은 지도에는 주요 도시들이 뚜렷이 표시돼 있다. 학생들에게는 주도(州都)와 인구, 그 주의 경제 개황을 적어 놓은 보조 자료집을 나눠 줬다. 이 책은 예를 들어 휴스턴이 속한 텍사스주의 주도는 오스틴이며 인구는 2천만명, 주요 산업은 정유.축산업 등이라고 적힌 지리 참고서라고 보면 된다. 전체 학생들 개개인에게는 상품을 하나씩 나눠줬다. "모든 상품에는 원산지 표시가 있어요. 한 명씩 일어나 상품과 원산지를 크게 읽어보세요." '오렌지, 플로리다' '딸기우유, 웨스트버지니아' '옥수수, 네브래스카' 등 학생들의대답이 이어졌다. 브레차씨는 학생들에게 교단 앞으로 나와 칠판에 붙어 있는 미국 지도에서 해당 주를 손가락으로 짚어 보라고 요청했다. 모두들 즐거운 놀이를 하듯 수업에 열심이다. '손수건, 중국' '전구, 멕시코' '속옷, 베트남' 등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가 대답에 포함됐다. 교단 앞으로 나온 학생들이 미국 지도 위에서 어디를 가리켜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브레차씨를 바라봤다. "원산지가 없다면 상품의 집산지를 찾아보세요. 상품을 한 곳에 모아 배포하면 훨씬 쉽고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들은 '집산지'라는 제도를 운영하지요." "아버지가 미국이 원산지인 상품을 사는게 더 애국적이라고 하셨는데요."(학생 웬디 코체이버)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요. 만약 멕시코가 미국에서보다 전구를 더 싼 값에 만들 수 있고 이를 미국산 통조림과 바꾼다면 두 나라 모두가 이익을 보게 되지요. 각국이 교역(trade)을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에요. 애국심에 호소해 미국 상품을 사도록 강요하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해요. 사람들은 어차피 값싸고 좋은 물건을 사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값싸고 좋은 물건을 고르는 사람을 흔히들 '현명한 소비자(smart consumer)'라고 하죠." 학생들에게 나눠준 상품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경제교육 시간이지만 지리교육을 접목시켰음을 알 수 있다. 배포된 상품은 미국 각 주의 대표 특산물로 구성돼 있다. 학생들이 경제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미국 지리도 익힐 수 있도록 한 세심함이 돋보였다.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여러분, 수업에 집중해줘 고마워요. 모두에게 초콜릿과 사탕을 하나씩 선물할게요." 학생들 모두가 즐거워하며 수업을 마쳤다. 담임인 존스 헤이건 교사는 "미국의 초등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을 놀이처럼 진행한다"며 "어린이들이 경제마인드를 키울 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시민단체와 학교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협조체제를 마련해 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휴스턴(미 텍사스주)=유영석 기자 yoo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