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끼리의 승부는 혁신(innovation)에서 갈린다. 거대 내수시장을 믿고 뒷짐지고 있던 미국 자동차회사들을 패퇴시킨 것은 품질혁신으로 무장한 일본 업체들이었다. 미국 중부의 작은 주 아칸소에서 시작한 월마트가 창업 40여년만에 세계 최대 기업이 된 것도 경영혁신이라는 엔진 덕분이었다. 기업가의 '창조적 파괴'를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봤던 경제학자 슘페터는 '기업가가 생산요소들을 새롭게 조합하는 행위'를 혁신이라고 불렀다. 혁신은 경영자가 빠뜨릴 수 없는 의무요,잘만 사용하면 큰 성공을 가져다주는 권한인 것이다. 일본이 1960∼70년대 산업 강국으로 우뚝 선 밑바탕도 바로 품질 혁신이었다. 일본은 50년대에 미국에서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통계학자 조셉 주란과 에드워드 데밍을 초청해 '신처럼 모셔가며' 품질을 공부했다. 이 시기 일본을 상징하는 경영혁신운동이 바로 도요타의 JIT(Just In Time;적시공급체계)다. 모든 공급망을 하나로 묶어 필요한 만큼 필요한 때 공급받는 JIT를 통해 도요타는 획기적인 원가우위를 확보했다. 생산직 근로자들이 불량을 발견하면 즉시 라인을 세울 수 있는 '간판시스템'도 최고 품질을 보장해줬다. 이렇게 유연한 생산시스템은 소비자들의 변덕스런 욕구를 가장 빨리 만족시켜줄 수 있었고 미국 소비자들조차 GM과 포드 등 자국 자동차업체를 외면해버렸다. 80년대 후반에 있었던 미국의 반격도 경영혁신으로 촉발됐다. 데밍이 다시 유명인사가 됐고 일본의 품질복음주의가 역수입됐다. 마침내 모토로라가 불을 댕기고 GE가 꽃피운 '6시그마 품질운동'이 탄생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정보통신붐과 시너지효과를 거두면서 미국은 세계 정상으로 복귀했다. 두 나라가 모두 지금은 장기호황 뒤의 불황으로 휘청이고 있지만 혁신으로 체질을 바꿔온 초일류 기업들은 오히려 더 높은 성장률과 수익률을 구가하고 있다. 창조적 파괴를 계속해나가는 혁신을 체질화한 덕분이다. 우리 기업들은 80년대엔 일본,90년대엔 미국을 베껴가며 혁신을 배웠다. 자동차 철강 등 대형제조업체들은 JIT를 앞다퉈 도입했다. 세계수준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원가경쟁력을 높였다. 6시그마도 제조업체라면 모두가 매달릴 정도로 열심이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에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화두에 입각해 잘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외부에 맡기는 아웃소싱(outsourcing)도 정착시켜 갔다. 한국 고유의 경영혁신운동은 없지만 경영혁신에 관한한 한국은 가장 빠른 학습자(fast learner)로 분명하게 자리매김해왔다. 그러나 올 들어 이런 경영혁신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헛수고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되고 있다. 두산중공업,철도노조,화물연대사태와 그 처리과정이 그것이다. 노동조합에 비해 협상력을 잃은 경영자가 어떤 혁신정책을 취할 수 있는가. 한 자동차 회사에서는 간판시스템을 핑계로 평일을 휴일로 만들어 샌드위치 휴가를 가버렸다. 공기업 가운데 가장 6시그마에 열심이었던 철도청의 노력도 파업 한번으로 고객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 물류대란은 적시공급은 고사하고 자칫하면 원자재가 없어 생산도 못할지 모른다는 위기감만 퍼지게 했다. 대형제조업체들은 그동안 아웃소싱했던 물류의 상당부분을 자체 인력과 장비로 다시 내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선택과 집중의 화두는 여지없이 깨져가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두산중공업,철도,화물연대의 파업 처리 과정에서 기업의 문제를 경영자가 통제할 수 없는 경영외적인 문제로 만드는 우를 범했다. 승부처인 혁신에서 손발이 묶여버린 경영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기업들이 투자를 제대로 하지 않는 이유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경영전문기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