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onung@seoulauction.com 엊그제는 어렵게 짬을 내서 덕수궁을 찾았다. 그곳 미술관에서는 '드로잉의 새로운 지평전'이 열리고 있었다. 일부러 평일을 택한 것은 5월의 신록에 묻힌 고궁의 고즈넉함속에서 '드로잉'과의 데이트를 만끽하기 위함이었다. 또 전 직장에 있을 때 점심시간이면 가끔씩 직원들과 도시락을 사들고 찾았던 기억에 이끌려서이기도 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우리 나라 화단을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는 50∼70대 작가 48인의 드로잉이 선보였다. 유난히 드로잉이 홀대받고 있는 우리 풍토에서 쉽게 마련될 수 없는 전시여서 더 큰 의미가 있다. 드로잉(drawing.소묘)은 습작이나 본격적인 작품을 위한 밑그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립된 회화이기도 하다. 가끔 해외 경매에서 유명작가들의 드로잉이 유화 못지 않은 비싼 값에 팔려 화제가 된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94년 빌 게이츠가 크리스티경매에서 3천만달러(약 3백60억원)에 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드로잉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드로잉이 작품으로 대접받고 거래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아직은 유화작품에 비해 형편 없이 저평가 되고 있지만 예전에 드로잉은 유화 작품을 사는 고객에게 덤으로 끼워주는 보너스 정도로 인식되기도 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상이자 드로잉 컬렉터인 얀 크루기어(75)는 "드로잉은 인간의 첫 울음이다.유화는 분식(粉飾)을 할 수도 있고,겹겹이 덧칠을 할 수도 있고,다시 그릴 수도 있지만 드로잉은 눈속임이나 거짓말을 할 수 없다.드로잉은 작가의 깊은 내면세계,원시성과 닿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금 속되게 표현하면 유화는 한껏 화장하고 차려입은 여인에 비유한다면 드로잉은 목욕탕에서 갓 나온 화장기 없는 얼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에 비유할 수 있겠다. 우리는 무엇이든 현란하게 치장하고 가꿔서 눈을 현혹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기업의 재무제표까지도 분식으로 눈속임하는 세태다. 소박하고 순수한 것들에 눈길을 주고 화사한 것들에 미혹(迷惑)당하지 말아야지…. 덕수궁을 떠나면서 다짐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