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우리를 살게 하는 힘..權澤英 <경희대 교수·영어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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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말이 없어 좋고,풀은 눈치없어 좋고,꽃은 픽 웃으니 좋다.
왕십리 지하철역 돌계단을 다투어 밟고 올라서 숨 고르려 맞은 편을 바라보면 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오월의 아침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게 아름다운 것,그것이 무엇일까.
단추를 하나 살짝 풀어놓은 사이로 힐끗 비치는 젊은 여인의 하얀 목덜미?
아니면 가느다랗고 까만 몇개의 샌들 줄 사이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여학생의 귀여운 발가락?
옛날 영국의 어느 시인은 살짝 풀어내린 운동화끈 사이로 힐끗 내보이는 여인의 하얀 발등이나,흘러내린 옷소매 사이로 보이는 손등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적이 있다.
너무 드러나면 비밀이 없고,너무 감추면 무정하여 끌리지 않는다.
드러나면서도 감추어지고,감추었는데도 드러난 것이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검은 전동차가 씩씩거리며 들어서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나는 놓칠세라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망막에 새기고 머리 속에 저장하여,왜 사는지 이유를 물을 때마다 조금씩 떠올리려는 듯 그렇게 마음껏 탐욕을 부려본다.
보드라운 솜털처럼 곱게 깔린 파란 잔디밭,연한 푸른색 옷자락을 길게 드리운 나뭇가지와 덤불숲.
아,그것만도 황송한데 군데군데 더듬더듬 빨간 장미꽃들이 피었다.
저것이 바로 오월의 장미구나.
오월의 장미는 부모님이나 스승에게 배달하는 커다란 꽃바구니 속의 장미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더듬는 희미한 불빛들처럼,장미는 파란 융단같은 잔디밭과 나무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드문드문 피었다.
그래서 붉게 타오르다가 슬쩍 식어지고,서늘하게 식어지려다 다시 타오른다.
장미는 더듬더듬 피었다.
누군가 안부를 물을 때 '그럭저럭 살지요'라고 답하듯이 그럭저럭 피었다.
단숨에 힘차게 몽땅이 아니라,그럭저럭 드문드문 오락가락…
이런 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 아닐까.
초록빛 병풍을 둘러치고 우아하게 서있는 장미를 보니 문득 장자의 우화가 생각난다.
남해의 제왕은 숙이고 북해의 제왕은 홀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의 공간을 지배하는 왕은 혼돈이었다.
가끔씩 두 왕은 혼돈의 땅에 가서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혼돈의 고마움에 보답하려고 두 왕은 깜짝놀래킬 즐거운 선물을 생각해냈다.
"사람은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 등 일곱개의 구멍이 있는데 혼돈은 한개의 구멍도 없으니 우리가 구멍을 만들어주자"
둘은 하루에 한개씩 일곱날 동안 혼돈에 구멍을 내었다.
마침내 일곱번째 구멍을 마쳤을 때 그들의 친구인 혼돈은 죽고 말았다.
그리고 두 왕은 다시는 그 푸근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혼돈은 쓸모없어 보이지만 그것 없이 우리는 살지 못한다.
장미송이를 떠받든 녹색의 병풍은 우리를 쉬게 하는 밤이요,휴식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혼돈에 지각의 구멍을 내어 다시는 즐거움을 맛볼 수 없게 된 두 왕같은 신세가 된 것은 아닐까.
쓸모있는 것만을 사랑하다보니 어느 틈에 혼돈은 사라지고 붉은 꽃만 달랑 남았다.
나무와 풀과 흙에서 떼어낸 장미는 금방 시들어 내던져질 쓰레기일 뿐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떠나버린 연인을 되찾으려는 주인공이 그 연인 대신 죽는 이야기다.
그는 강건너 멀리보이는 파란 불빛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돈을 많이 벌면 그녀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관능과 잔인함의 그 불빛은 너무 느려서 잡지 못하거나,너무 빨라서 지나쳐버리는 미혹(迷惑)의 불빛이었다.
그는 부자가 됐지만 자신이 이미 그 불빛을 지나친 줄은 몰랐다.
우리도 너무 빨리 달려서 이미 행복의 불빛을 지나쳐버렸나보다.
동양의 시인도 서양의 작가도 하나같이 '너무 빨리 달리지 말라'고 했는데….
동서양을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의 틈새로 문득 아홉시뉴스에서 본 어느 남자의 절규가 떠오른다.
경찰서에 잡혀온 마약중독자는 말했다.
"죽고 싶어서,다 잊고 죽고 싶어서…."
흐느끼는 듯한 그 말이 내마음을 콕콕 찌른다.
혼돈을 죽인 나는 오월의 신선한 아침,녹색과 붉은 색의 절묘한 조화를 탐욕스레 움켜쥔다.
그리고 죽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보는 사진처럼 그것을 떠올린다.
이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이렇게 마음에 간직한 자연의 이미지뿐인가 보다.
tkwon@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