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에서 나일강은 강(江)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나일강을 중심으로 해뜨는 동편은 국왕과 왕비 왕족이 사는 지역이고,해지는 서편은 그들이 묻히는 '사후'의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집트 피라미드는 나일강의 서편에 몰려 있다. 동편과 서편,즉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유일한 매개는 나일강의 배다. 미라 작업과 피라미드가 건조되는 동안 시신을 옮길 때 동원됐던 배는 버려진다. 더 이상의 쓸모가 없어서가 아니라 배에 연연하면 '큰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배를 과감히 버리느냐의 여부가 피라미드 건조의 성공에 직결되었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고기를 잡으면 그물을 버리고,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버린다는 말이 있다. 새삼스럽게 '버리는 얘기'를 꺼내는 것은 종(從:배)이 주(主:피라미드)의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우를 범해선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오는 4일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지 1백일이 되는 날이다. 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에 많은 공약을 내걸었다. 대통령이 된 이상 대선공약을 충실히 이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은 대선후보가 아니다. 지지했던 사람도,그 반대에 섰던 사람도 모두 상대해야 하는 '국민의 대표'다. 특정 지지 세력에 포위돼선 안된다. 선거때 노 대통령을 포함한 대선후보들은 '표를 쫓는 사람'에 불과했다. 노 대통령은 대선 막판에 정책이나 이념 차이가 큰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하기까지 했다. 각 후보진영은 표가 된다면 경쟁자의 공약을 베끼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유권자의 눈에 그렇게 비쳐졌다. 유권자들은 공약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공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도 유권자들은 별로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92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취임식 직후 국정운영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권위 있는 연구소 관계자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은 "어떻게 하면 국정수행을 잘 하고 대선공약을 실천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답변은 뜻밖이었다. 참석자의 한 사람은 "대선공약을 깡그리 무시해야 국정운영을 잘 할 수 있다"고 답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 전문가의 충고를 귀담아 들었고,96년 재선에 성공했다. 공약에 관한 한 노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공약중에는 현실성이 없거나 유권자를 의식해 발표한 것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대선 당시 노 대통령의 선거참모들은 환경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만금간척사업을 조기에 마무리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전북지역 유권자를 의식한 것이다. 사회갈등이 심화될 때는 눈을 감는 것이 공약이다. 정부는 앞으로 증권분야 집단소송제 도입과 상속세 포괄과세,출자총액제 강화 등을 입법을 통해서 시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경제사안을 포함해 "공약이기 때문에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고집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지금의 경제 상황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여러 가지 경제지표들은 대선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지방에서 만난 한 재래시장 상인들은 "매출이 외환위기때의 절반에도 못미친다"고 푸념하고 있다. 청년실업자는 늘고,부동산값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뛰었다. 정부는 경제를 살린다면서도 공약 실천이라는 명분으로 경제에 부담을 주는 측면이 없지 않다. 지금부터라도 노 대통령은 공약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오직 국가의 장래와 경제활성화,국민소득 향상 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공약 실천(배)에 얽매이다 보면 경제정책 시행(피라미드 건조)을 실기할 수 있다. '경제위주 실용주의'로 신속히 전환하느냐의 여부가 참여정부 성공의 관건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yg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