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슬랙(organizational slack)'이란 개념은 글자 그대로는 기업 내에 쌓여 있는 군살 혹은 잉여자원을 가리킨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과잉 인력,유휴 설비 등이 대표적인 예다. 경영수지에 부담만 주는 이런 '군더더기'들을 줄여가는 작업은 기업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여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허리띠 졸라매기'를 해당회사 밖에서 긍정적으로 봐주는 건 이 때문이다. 지난 1930년대 미국의 조직이론가인 체스터 바너드에 의해 처음 소개된 개념인 '조직 슬랙'은 그러나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군살이나 잉여자원을 미래 성장을 담보하고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완충재로 보는 시각이다. 지금 인력이 넘치고 생산능력이 남아도는 회사가 있다고 하자.이 회사는 최악의 불황이 닥칠 때 이런 여유자원을 버려가며 위기를 넘길 수 있다. 넘치는 인력을 내보내 인건비 비중을 떨어뜨리는 것만으로도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른다. 잉여 생산능력을 떼내 팔 경우 특별이익을 올릴 수도 있다. 항해속도는 느리지만 파도에 끄덕없는 대형 선박처럼 평소 효율은 낮을지 몰라도 큰 위험을 넘길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회사들은 이러한 여유자원을 가지고 있다. 비만한 사람들이 병에는 상당한 저항력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업도 어느 정도의 '비계'가 있어야 어려움을 헤쳐갈 수 있다. 조직을 지나치게 날렵하게 만들어 꼭 필요한 인원과 생산설비만을 갖춘 회사라면 불황이 닥쳐 물건이 덜 팔리기 시작했을 때 대처할 방법이 별로 없다. 지금 당장 도움이 안된다고 새 기술 및 새 상품에 대한 연구개발(R&D) 예산을 끊어버린 뒤 5년 후,10년 후를 기약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제위기 당시 R&D 부문을 줄였던 것이 우리 경제가 구조조정 이후에도 재도약하지 못하고 있는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지적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비계'를 제거한다면서 '근육'까지 없애버리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되돌아볼 일이다. 여기다 빠뜨릴 수 없는 것으로 남이 군살을 뺀다고 해서 살도 찌지 않은 사람들마저 다이어트에 나서는 것과 같은 기업들의 행태다. 국내 최대기업이 골프장 회원권을 판다는 뉴스가 나왔으니 과거의 사례를 볼 때 골프장 회원권 매각에 나서는 기업이 줄을 이을 게 뻔하다. 왜냐하면 비교적 형편이 낫다는 회사가 골프장 회원권을 파는 판국에 그보다 못한 기업이 회원권을 갖고 있을 명분이 적어서다. 그러나 그 회사가 10개 있는 회원권을 판다면 그동안 자금사정 때문에 2개밖에 못 갖고 있던 경쟁사는 '이 기회에'싼 값으로 사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대기업그룹이 인력 조정을 한다면 거기서 밀려나오는 고급 인력을 스카우트하려는 회사들이 나와야 한다. 대기업이 공채를 크게 늘리지 않는다고 해서 중소·중견기업도 똑같은 행태를 반복하는 것은 눈치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듯이 덩치를 줄여야 할 기업이 있지만 늘려야 할 회사도 있고,또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할 업체가 있는 법이다. 경영자는 발은 땅을 밟고 있되 눈은 저 멀리 지평선에 두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과잉 혹은 잉여가 지금은 분명 부담이지만 미래를 담보해주는 잠재력은 바로 그런 여유자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험감수가 꼭 인수·합병 등 거창한 것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다. 5년 뒤,10년 뒤의 승리를 위해 여유자원을 끌어안고 가는 것도 승부수가 될 수 있다. 대기업이 군살을 줄이면 중견·중소기업이 그 '군살'을 싼 값에 챙겨야 나라 경제도 균형있게 발전할 수 있다. 유행처럼 허리띠를 졸라매다 영양실조에 걸리는 기업이 생길까 걱정돼 하는 얘기다. 경영전문기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