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쟁의 조기 종결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는 사스(SARS),노사분규 등의 악재로 좀처럼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실물경제 침체도 문제지만 신용불량자가 늘어나면 가까스로 봉합해 놓은 카드채문제가 불거질 위험이 크다. 지난 4월 실시된 카드채 유동성 지원정책이 6월 말 종료되므로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대비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위해 적기 시정조치,대주주 증자,부실채권 매각,채권담보부증권(CBO) 도입 등 다양한 방안이 논의되고 있으나 한 가지 도외시되고 있는 과제가 있다. 기업어음(CP)제도 개선이 바로 그것이다. CP란 기업들이 단기자금 조달을 위해 신용을 바탕으로 발행한 만기 1년 이내의 융통어음을 뜻한다. 2002년 3월 말 카드사 CP잔액은 22조원으로 카드채 잔액 29조원에 비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일부 투신사가 CP에 만기연장 권리(option)를 부여한 뒤 단기펀드인 MMF에 편입시켜 카드채문제를 악화시켰다. 만기연장 옵션을 이용해 단기채권인 CP를 장기채권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 결과 옵션CP 환매를 요청해도 일부 투신사가 응할 수 없었고 건전한 투신사로까지 유동성 위기가 확대됐다. CP가 금융시장 불안의 핵이었던 사례는 99년 대우사태에서도 볼 수 있다. 대우는 외환위기 직후 은행대출이 까다로워지자 회사채를 발행해 은행빚을 갚았다. 그러다 회사채 발행조차 어려워지자 CP를 대량으로 발행한 후 도산했다. 이와 같이 CP가 자금 압박을 받고 있는 기업의 한계자금 조달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었던 것은 CP시장의 투명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CP는 약속어음이기 때문에 채권과 달리 이사회 의결을 거치거나 금융감독원에 발행기업을 등록하고 유가증권 신고서를 제출하는 등의 절차없이 발행할 수 있다. 만기가 일주일 미만인 초단기CP에 대해 복잡한 절차를 의무화하면 CP의 상품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허용한 특혜다. 하지만 이런 특혜는 여러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우선 발행이 편리하다보니 CP는 단기자금 조달수단이란 본연의 기능을 넘어 회사채를 손쉽게 발행하는 대체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만기가 6개월 이상인 CP 비중이 선진국에 비해 높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 발행정보를 집계하는 기관이 없다보니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DB)도 없다. 그 결과 CP의 총발행량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 채 발행기업 이름만 보고 투자대상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 우리 시장의 현실이다. 기업들에 편리하고 신속한 자금조달 수단을 제공하면서도 시장의 투명성을 제고하려면 예탁원을 통한 CP의 등록발행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사회 의결,유가증권 신고서 제출의무 등은 전처럼 면제해줘 CP의 상품성은 유지하되,발행등록만은 채권과 같이 예탁원으로 집중하자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발행정보가 집중돼 DB구축이 가능해져 기업별 발행정보가 공개될 수 있다. 또 CP가 등록발행되면 유통시장이 활성화된다. 현재 CP는 어음법에 의해 실물로 발행돼야 하고 분할양도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투자가가 CP를 양도하려면 발행기업에 실물분할을 다시 요청해야 한다. 이러한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일부 기관은 보관증을 통해 분할거래를 하고 있으나,이는 어음법에 저촉되며 보관증의 법적 지위가 불분명해 분쟁의 소지가 크다. 이에 반해 예탁원에 등록발행된 CP에 분할양도를 허용하면 투자자간 계좌대체가 가능해져 유통시장을 활성화할 수 있다. 예탁원을 통한 등록발행 제도가 성공하려면 예탁원의 서비스 개선이 전제되어야 한다. CP는 은행업무 종료시간에 1원 단위까지 맞추어 발행되기도 하며,발행 다음날 결제가 필요한 경우도 많다. 그러나 현재 예탁원의 시설을 가지고는 초단기CP의 등록 및 결제를 수용하는데 기술적인 한계가 크다. 이를 무시한 채 CP 등록발행을 의무화하면 오히려 CP시장이 위축될 위험이 크다. 미국 MMI 시스템처럼 전자시스템을 구축한 뒤 등록발행을 추진해야만 시장을 위축시키지 않고 투명성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카드채문제를 해결하려면 단기유동성뿐만 아니라 CP제도 개선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옵션CP와 같은 황당한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 rhee5@plaza.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