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갑하산(甲下山) .. 이정균 <을지대학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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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ck@emc.eulji.ac.kr
갑하산(4백96.2m) 정상에 서 있었다.
예로부터 명당자리로 전해오더니 국립현충원이 세워졌다.
선조들은 1년 24절기중 손이 없다는 청명(淸明) 한식(寒食)에는 벌초와 성묘를 하고,망종(芒種)에는 제사를 지냈다.
고려 헌종 5년 6월6일 조정에서 장병의 뼈를 집으로 봉송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문헌 기록을 근거로 1956년 망종인 6월6일을 현충일로 정했다.
1950년 필자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전쟁 중 유명을 달리하셨던 선생님들의 위령제 제문을 눈물을 뚝뚝 떨구시며 읽어주시던 국어선생님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나는 광주산골을 헤매이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는 부제가 붙은 애국시로 뜨거운 조국애를 읊었다.
'산옆 외따른 골짜기에/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아무말,아무 움직임없이/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나온다……'
훗날 시인은 비참했던 전쟁의 비극,적 치하 공포의 나날을 후기(後記)로 남겼다.
'그 때 나는 남루한 치맛자락을 끌며 석달째 어느 초가 지붕 밑으로 나를 숨기기도 하고,수수밭 속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면서 기구한 목숨을 끌고 다녔다.
인가(人家)도 무서웠고,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내무서원과 마주치는 것도 두려웠다.
나지막한 산등성이로 기어올라 사흘째 밤을 새던 날 새벽,바위에 몸을 기대고 쓰러졌던 내 뺨에선 피가 흘렀다.
(중략) 마지막 서로의 최후 결전이었다……'
한명희 작사,장일남 작곡의 비목(碑木)은 국민가곡이 되었다.
강원 철원 전투를 상기하며 평화의 댐 비목공원에서는 올해도 비목문화제가 열린다.
이 조국산하는 녹색혁명에 성공하였고 벼심기,논농사 힘들어 망종(芒種)을 망종(忘終)이라 한탄하던 농사 일은 기계화되었다.
지난 50년동안 이 나라는 농경시대를 거쳐 산업화사회,정보화사회로 치달으며 발전하여 경제성장을 이룩하였으나 정신적 계발은 뒤따르지 못했다.
잊고 살았던 아쉬운 일은 한 두가지가 아닐 듯싶다.
순국선열에 대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며,거안사위(居安思危) 잊지 말자.순국선열들이시여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