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잘 알려진 윤동주의 시 '무서운 시간'의 한 대목이다. 언뜻 보더라도 일제말 암흑기를 살던 시인의 절망의 감각을 시리도록 확인하게 된다. 문득 이 시를 떠올린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요즘 우리네 삶에서 '무서운 시간'을 속절없이 체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끈 떨어진 광대 같은 사람들,콩 심으러 콩밭에 갔는데 볶은 콩밖에 없는 농부의 처지와 같은 사람들,강물에 빠져 뱀에라도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 정치의 광장에서,경제의 객장에서,사회의 뒷골목에서 우리는 흔히 그런 사람들을 마주친다. 불안과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는 자못 길다. 희망의 푸른꽃은 너무나 먼 곳에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느낀다. 흐트러진 실타래처럼 좀체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현실의 잿더미 속에서 악마처럼 반짝인다. 특히 저성장 고실업이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경제불황은 으뜸되는 절망의 현실지표다. U자가 아닌 L자 모형이 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어 우리를 더욱 불안케 한다. 현실이 그토록 엄혹하다보니 누구랄 것도 없이 피곤해 있고,또 성정이 거칠어져 있는 것 같다. 스트레스도 급증하고 온갖 신경성 질환도 많은 것 같다. 요구와 현안은 많고,수용과 대안은 적다. 대화는 적고,분쟁은 많다. 사랑하기 어려운 난세에 가깝다. 그러면 우리는 이 난세를 어떻게 견디고 희망을 예비할 수 있을 것인가. 각 분야 전문가들의 각별한 지혜와 노고가 필요하겠거니와,우리 공동체 전반이 나누어 가져야 할 책무도 적지 않을 터이다. 우선 절망의 현실에 합당한 비판적 분노.루스벨트조차 뉴딜정책을 배반했다고 비판했던 도스 패소스의 '미합중국'3부작 중 '재벌'(1936)에 나오는 주인공의 항의의 담론이 떠오른다. "말해 보시오.철학박사님들.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적어도 사람은 투옥되지 않고,공포가 없어야 하며,배고프지 않아야 하고,추위에 떨지 않아야 하며,사랑이 없어서는 안되고,한 남자나 여자나 어린이가 필요한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권력자들을 위해 일하는 일이 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혹은 참절망과 진정한 고통을 겪은 사람이 남과 더불어 실천하는 윤리학.내가 잘살 때 남을 생각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진정 남과 더불어 사는 상생의 지평은 내가 가장 어려울 때도 나눌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 할 줄 안다. 이 대목에서 미국 공황기 문학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끝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모든 것이 고갈돼버린 것 같은 느낌이 편만(遍滿)했던 당시 "사람들 눈에는 좌절이 있었고 굶주린 눈에는 분노가 자라고 있었다. 사람의 영혼 속에는 분노의 포도알이 자라서 수확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표현했던 스타인벡이었다. 그런데 그 분노는 어떻게 승화되는가. 기아와 살육,분노와 폭력,파업과 투쟁,좌절과 죽음으로 얼룩진 고난의 여정으로 인해 기아에 허덕이던 임신부 샤론은 결국 사산(死産)하고 마는데,그런 절망의 극한에서 그녀가 허기로 죽어가는 노동자에게 자기의 젖을 물리는 장면에서 승화된다. 죽임의 상황에서 살림에로,절망에서 희망으로 이르려는 엑소더스에의 강렬한 의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닐 수 없다. 누구라도 이 장면에서 난세를 견디는 생명력과 형제애를 느끼게 될 것이다. 정녕 절망한 자가 온몸으로 모색하는 희망의 기획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지금,여기서도 그 같은 절망의 역설적 지혜를 궁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헤르만 헤세의 믿음처럼 신이 우리들에게 절망을 보내는 것이 어디 꼭 우리들을 죽이려는 의도겠는가. 그보다는 우리들 속에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런 믿음을 우리가 함께 나눠 가질 수 있다면,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던 키에르케고르를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일찍이 칼라일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절망을 끝내 견디어 내면 완전히 둥근 원이 이루어져서 그것은 다시금 뜨겁고 보람있는 희망으로 변한다고 말이다. 절망의 수레바퀴일지라도 희망처럼 굴려볼 일이다. wujoo@mail.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