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세 신입사원 박도봉에게 열처리 공장 생활은 낯설고 힘들었다. 당시 열처리 업체들은 가스버너 불로 금속을 달구는 그야말로 대장간 수준이었다. 박도봉은 12시간씩 일하고 맞교대하는 1일2교대 근무에서 야간작업부터 시작했다. "처음 한달 간은 청소만 시키더군요.첫 월급은 19만8천원이었어요.버너에서 나오는 연기를 뒤집어 써 온몸이 새까맣게 변한 모습을 볼때 처량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그러나 10년 정도 일을 배워 꼭 창업하겠다고 다짐하며 어려움을 참고 견뎠죠." 당시 작업반장은 초등학교 졸업학력의 스물세살 젊은이였다. 하지만 1천30도를 온도계도 없이 눈짐작으로 정확하게 맞춰내는 고도의 숙련기술을 갖고 있었다. 비좁은 작업현장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애쓰는 작업반장과 선배들을 보고 박도봉은 현장 기술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그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선배들에게 건네며 어깨너머로 6개월간 기술을 익혔다. 그러던 중 87년 가을,영업부장이 찾았다. 웬일인가 싶어 가보니 영업사원 한 명이 그만뒀다며 이제부터 영업을 하라는 것이었다. 길도 모르고 운전도 서툴렀지만 그는 기꺼이 응했다. 반월공단 영등포 등을 이잡듯 뒤지고 다녔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주머니에 명함 30장을 넣고 나왔어요.오늘 이것을 다 돌리지 않으면 집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죠.8개월 정도 고생하고 나니까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생산과 영업을 모두 익힌 박도봉은 88년말 광덕열처리를 떠나 마침내 창업을 하게 된다. 10년 정도 일을 배울 생각이었지만 2년정도 지나자 "이 정도면 '기업인의 꿈'에 도전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긴 것이다. 그는 인천에서 공장을 하는 선배에게 부탁해 선배의 공장 한구석에 장안종합열처리라는 회사 간판을 내걸었다. 직원은 아내와 갓 공고를 졸업한 사원까지 고작 3명. 전화는 이웃집 도움을 얻고 12인승 승합차를 할부로 구입했다. 막 생겨난 농공단지까지 쫓아다니며 일감을 땄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에 5백km씩은 돌아다녔습니다.정말 목숨걸고 일했어요." 당시 거래처 중 새한미디어 충주 공장이 있었는데 박 사장은 인천에서 차를 몰아 아침 출근시간전에 공장에 도착했다. 일감을 따는 사람이 당연히 일찍 와서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공장장이 지각한 직원들을 불러세워 놓고 "인천에서부터 새벽같이 와 있는 사람도 있는데 코앞에 살면서 지각하는 너희들은 뭐냐"며 큰 소리로 나무라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공장장이 새벽 일찍 기다리는 박 사장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 박 사장 차는 정문을 보다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일에 매달린 결과 실적은 사업 초기부터 괜찮았다. 89년 첫해 3천8백만원의 매출을 올리고 90,91년엔 매출 6천만원에 절반이상을 이익으로 남길 수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박 사장은 그해 부천에 50평짜리 공장을 임대해 번듯한 공장을 차린다. 장경영 기자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