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간강사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왜 그랬나? 의혹을 품을 것도 없었다. 그의 신분이 사태의 전모를 몽땅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개인으로서 죽은 게 아니라 '대학 강사'로서 자살했다. 한국의 대학 강사라면 누구에게나 상존하고 있는 위험이었다. 상존하는 위험이라니! 맙소사,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그러나 그게 현실인 것이다. 학식과 덕망을 쌓은 고급 두뇌라는 T강사들의 '매트릭스(matrix)'를 벗어나 '실재의 사막'으로 가 보자.최저 생계비도 안되는 간헐적 임금 노동자,배우자의 경제력에 기생해야 하는 '등처가',사회보장제도 및 자구(自救) 장치로부터 배제된 뜨내기.사막은 단순히 물질적 폐허인 것만이 아니다. 정신적 황폐야말로 사막의 진면목이다. 장래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 때문에 감수해야만 하는 온갖 평가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끔찍하기만 한 인간관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무언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불행한 의식. 배운 것만큼 드높은 자존심은,드높은 만큼 더 무참하게 가속도를 타고 추락한다. 이 부당하게 폄훼된 사람들의 연원은 제5공화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졸업정원제라는 희한한 제도와 함께 불어난 학생들, 그리고 마구잡이로 허가돼 전국의 군단위에까지 난립한 대학들이 대학교수의 대량 수요를 발생시켰으니,1980년대 전반기는 석사 학위만 소지하고도 거침없이 교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때 '교수'는 무척 탐나는 동시에 아주 만만한 직업이었다. 대학원으로 학생들이 갑자기 몰려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회사 다니던 사람들마저 수건을 머리에 동여맬 것도 없이 학교로 귀환했다. 그러나 인구는 한정돼 있고 따라서 교수의 빈 자리도 급속히 동이 나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기부터 뒤늦게 기차에 올라탄 사람들은 내릴 역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기차는 만원인 채로 철길에 그냥 멈췄다. 아! 철마는 달리고 싶다. 장기적 전망은 고려하지도 않고 눈앞의 문제만을,그것도 획기적으로 해결하려고 용 쓴 교육관계자들의 근시안적 정책이 근본 원인이다. 교수 자리뿐이랴.국제학대학원(혹은 일명 지역학대학원)이나 통역대학원 방송대학 교원대학 사이버대학 등을 생각해 보라.도대체 그 사람들을 키워서 어떤 자리에 어떤 방식으로 배치할 것인지에 대한 어떤 대비책도 없는 채로 무작정 교육기관들을 신설하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원인을 찾았다고 해서 해결책이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지금 이 사람들을 어찌할 것인가? 게다가 인구 감소와 소위 '교육 개방'은 공부하는 한국사람들의 진로를 원천적으로 병목 상태로 만들 것이다. 지식이 없으면 장래도 없다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진리이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계속 유지되고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공부하는 한국인들은 계속 나와야 한다. 전망은 실로 암담하기 짝이 없는 데도 말이다. 한 사람이 목숨을 끊으니 그나마 한 가지 처방이 나왔다. '간헐적 임금을 정기적 급여로 바꾸고,사회보장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나왔다. 아쉽지만 다행이고,다행이지만 걱정스럽다. 그게 실제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넘어야 할 고개가 무척 많을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근본적 처방은 아니다. 근본적 처방이 있긴 있는 것인가? 차제에 나는 교수 자격시험을 제안하고자 한다. 나는 앞에서 물질적 궁핍보다 정신적 황폐가 더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신적 황폐의 근본적인 원인은,자신의 현재 지위를 수긍할 수 없다는 불행한 의식이다. 불행한 의식을 가라앉히려면,교수 선발제도를 최소한이나마 납득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 공평성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선발에서 낙오한 사람들이 신속히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이 교수 자격시험이다. 교육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기본과목 몇개와 연구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세부 전공 하나를 넣어야 한다. 기본과목은 공통으로 측정하고,세부 전공의 측정은 그 분야에서 합의된 학자 집단에게 맡겨야 한다. 10여년 전 내가 이런 얘기를 했을 때 모두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도 그러할 것인가? circe@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