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을 비교해 보면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취임 초 온갖 난관을 겪은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클린턴은 훗날 경기호황 덕분에 찬사를 받았다. 학자들은 이같은 사실을 들어 '경제만 잘하면' 노 대통령도 박수를 받을 것으로 전망한다. 과연 그럴까? 클린턴처럼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한 길은 험난하다. 클린턴은 임기 초 패착을 거듭했다. 군내 동성연애자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조치는 군부의 맹렬한 반발에 부딪혀 유야무야됐다. 부인 힐러리의 주도로 야심차게 추진한 의료보장체계 개혁도 급진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좌초했다. 그 뿐이 아니다. 언론매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클린턴의 염문설ㆍ독직설을 퍼뜨렸다. 화이트워터 스캔들이 터져나온 것도 임기 초이다. 제니퍼 플라워가 클린턴과 관계를 맺었다고 증언한 시점 역시 다른 대통령들은 언론과 이른바 '허니문'을 즐기고 있었을 시기였다. 이러한 클린턴이 초기 실패를 딛고 경제호황을 이끌어 찬사를 받은 데는 두 가지 파격적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첫째, 그는 백악관을 과감하게 개혁했다. 표류하던 클린턴이 구원을 요청한 사람은 데이비드 거겐(David Gergen)으로 당시 야당인 공화당의 대표브레인이었다. 그는 공화당 소속 대통령을 세번이나 보좌한 베테랑 스태프였다. 거겐의 눈에 비친 백악관은 '혼돈' 그 자체였다. 각종 회의는 토론을 위한 토론으로 전락, 정해진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고, 클린턴은 너무 많은 일에 시시콜콜 참견하고 있었으며, 추진하는 정책들은 하나같이 급진적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난맥상의 배경에는 열정은 있지만 국정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 젊은 보좌관들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거겐의 등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의제 선정 및 각종 사안의 논의과정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고, 언론과의 관계는 적대적에서 상호존중으로 전환됐다. 또 각종 정책의 기조는 야당인 공화당지지자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물론 대가가 따랐다. 선거운동 때부터 동고동락해온,그러나 '아마추어 국정'이라는 비판을 불러왔던 젊은 보좌관들이 백악관을 떠났다. 그러자 국민들은 클린턴의 국정능력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둘째, 클린턴은 민주당과 자신의 고정 지지기반의 이해와 충돌하는 경제정책을 입안, 집행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멕시코 캐나다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했다. 멕시코 저임노동자들과의 경쟁을 우려한 노조와 수많은 시민운동단체가 연대해 맹렬하게 반대운동을 전개했지만, 클린턴은 단호했다. 아울러 그는 균형재정을 실현해 적자재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수혜자와 혜택을 대폭 축소하는 방향으로 복지정책을 개혁했다. 이로 인해 중앙정부와 주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한 기준은 더욱 강화됐고, 실업수당 등 복지혜택이 조건부 시한부로 변화됐다. 하나같이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 이익과 상반되는 이 조치들은 정치적 도박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일련의 경제정책들은 때마침 시작된 정보산업붐과 더불어 90년대 미국경제 호황의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호황은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 노동자 빈민 그리고 소수인종들을 열렬한 지지층으로 흡수하게 해주었다. 과연 노 대통령이 이처럼 과감한 행보를 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회의적 전망이 지배적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노 대통령의 자기변신은 쉽지 않을 것이다. 청와대 작동 메커니즘과 그 결과물인 정책들이 많은 국민들을 불안감과 실망에 빠뜨렸어도 국정경험이 있는 인사를 파격적으로 채용할 듯이 보이지는 않는다. 경제정책 또한 지지기반의 이익에 어긋나는 것을 집행할 조짐은 안보인다. 오히려 '참여복지'라는 이름의 대규모 복지정책이 추진될 전망이고, 특별경제지구 추진,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 그리고 자유무역협정 체결 등은 농민과 노동자 단체의 반발에 발이 묶여 있다. 과감하고 파격적인 인사단행과 정책전환으로 제2 도약을 기대하는 것은 국민의 여망이다. 우리는 노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 kesopyun@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