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AI'와 '턱시도'엔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의해 누구든지 담배만 꺼내물면 자동으로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주는 것이다. 애연가들의 희망사항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라이터가 생겨난 건 1906년 오스트리아의 베르스바흐가 철과 세륨의 합금을 발화석으로 사용하는 법을 발견하면서부터. 라이터의 대명사로 불리는 지포(Zippo)는 32년 미국의 조지 브라이스델이 투박한데다 불편한 오스트리아산 라이터를 개조함으로써 태어났다. 지포라는 이름은 당대 최고의 발명품으로 여겨지던 지퍼(zipper)에서 따온 것이고, 라이터 밑면에 있는 2032695는 36년에 받은 특허출원번호, 2517191은 53년 플린트 튜브관(라이터돌 관) 특허를 내면서 얻은 번호라고 한다. 지포라이터는 2차대전 중 장병들이 담배를 피울 때는 물론 C레이션(야전식량)을 데우거나 어둠을 헤치고 폭발물을 터뜨릴 때 등 온갖 일에 쓰면서 없으면 안될 필수품으로 떠올랐다. 지포신드롬이라는 말과 '화염을 방사하다'(to zippo)라는 동사가 생겨났을 정도다. 지포라이터의 특징은 누가 봐도 지포임을 알 수 있는 단순한 모양과 거센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밖에 뚜껑을 열 때의 경쾌한 소리,오래 사용할수록 푸근한 감촉,독특한 냄새, 여기에 개당 20달러 미만의 기본형까지 평생 무상수리를 보증하는 것도 오랜 인기의 비결로 여겨진다. 가스라이터와 전자라이터가 나온 뒤에도 승승장구하던 지포가 세계적인 금연 바람으로 인해 궁지에 몰렸다는 소식이다. 올해 라이터 매출목표(1천3백50만달러)가 96년보다 25%나 줄고 그 결과 전체 매출 목표도 3년째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이다. 결국 라이터 매출 비중을 줄이기로 하는 등 대책 강구에 골몰하고 있다고 한다. 영원한 히트상품도 업계의 절대강자도 없으며 따라서 어떤 기업도 시대 변화에 적절히 대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입증하는 셈이다. 바비큐그릴ㆍ벽난로용 라이터와 이동식 히터를 내놓는가 하면 주방용품 사업을 확장하는 등 변신을 모색중이라는 지포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거듭날지 궁금하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