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30년 전인 1973년 7월3일. 한국이 '포항제철'이라는 기업을 통해 산업의 자립을 시도한 날이다. 이날 포스코(옛 포항제철)의 고로(高爐)에서 처음으로 쇳물이 나왔다. 세계 각국의 근대산업은 철을 정점으로 정형화된 틀을 통해 발전하면서 자립화 단계를 밟아 왔다. 농업에서 공업으로 넘어가면서 기본이 되는 산업이 제철업이다. 자동차 조선 전자는 철의 '자립'를 거쳐 탄생한 파생산업이다. 철을 '산업의 쌀'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포스코는 일본 정부로부터 식민통치에 대한 피해보상금으로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해 지어졌다. 당시 포스코는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경부고속도로의 3배에 해당하는 1천2백5억원이 투자됐다. 연 인원 5백81만명이 투입된 사상 초유의 대형 공사였다. 공사는 성공했다. 포스코는 가동 1년 만에 당시 투입된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 2백42억원의 흑자를 실현했다. 지금까지 단 한 차례의 적자도 없이 흑자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포스코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부터 제철소 건설 단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했기 때문. 포항제철소의 조강 t당 단가는 4백22달러로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브라질 투바라오 제철소(7백달러)의 65%에 불과했다. 여기에는 가장 적은 투입으로 최단기간 내에 목표를 달성하는 저돌적인 군사문화의 효율성도 한몫했다. 당시 포철 직원들은 누런 유니폼과 군화를 신었다고 해서 '황군(黃軍)'으로 불렸다. 포항제철소를 짓는 과정에서 93명이 숨졌다. 1970년 설비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일 당시 '중동(中東) 특수'로 사람을 구하지 못해 추석을 반납하자는 운동까지 벌였다. 포스코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난 30년간 총 4억1천8백78만t의 철강재를 생산함으로써 한국을 세계 5위의 철강 생산국으로 끌어올렸다. 생산량의 72%를 국내에 공급, 세계에서 조선 1위, 가전 2위, 자동차 6위 등 한국 제조업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했다. 포스코는 199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 유럽 미국의 유수 철강사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수익을 실현하고 있다. 대규모 인수ㆍ합병 등 철강업계의 국제적인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포스코는 최고의 가격과 품질 경쟁력을 바탕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유일한 기업이다. 미국의 대표적 투자은행인 모건 스탠리는 포스코를 세계 철강기업 중 생존능력이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포스코의 생존지수는 15년으로 세계정상을 다투는 신일본제철의 10년, 대만 CSC 제철소의 5년보다 훨씬 높았다. 포스코는 1988년 국민주 1호로 공개되면서 국민의 기업으로 출발, 1994년 국내 최초로 뉴욕 증시에 주식을 상장시키며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성장했다. 2000년 10월 민영화와 함께 정부는 포스코에 출자한 종잣돈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회수했다. 지난 86년까지 정부가 출자한 2천2백5억원을 주식 매각 및 양도(3조6천1백55억원)와 배당금(2천7백44억원) 등 3조8천8백99억원으로 되갚았다. 포스코는 법인세 등 연평균 6천억원의 세금을 내고 있으며 지금까지 총 5조5천6백40억원을 납부했다. 정부 출자금액에 대한 투자수익률은 연평균 16.1%로 같은 기간 일반 은행의 대출 우대금리 연평균 수익률 14.4%보다 약 1.7%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포스코는 이제 연간 철강생산 3천만t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연산 1백3만t 규모의 포항제철소 1기 설비를 처음 준공한 이래 30년 만이다. 포항제철소 2∼4기, 광양제철소 1∼5기 증설로 연산 2천8백만t을 넘어선데 이어 파이넥스 설비가 상용화되는 2005년에는 3천만t 체제에 들어서게 된다. 포스코 윤석만 전무는 "아직까지 철이 없는 인류문명은 생각할 수 없다"며 "포스코는 철기시대가 마감될 때까지 살아남는 마지막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