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와 60년대 '라인강의 기적'의 발원지였던 독일 루르(Ruhr)지방의 물류 중심지인 뒤셀도르프. 이곳에서 승용차를 타고 서북쪽 방향으로 30분 정도 달리면 독일 철강 산업의 본산인 뒤스부르크가 나온다. 대표적 철강회사인 티센크룹슈탈(ThyssenKrupp Stahl) 본사 앞에 도착한 것은 지난 3일 오후. 갑자기 쏟아진 폭우 때문이었을까. 인적은 드물었고 삭막한 느낌마저 들었다. 독일의 군수산업과 첨단 제조업체들에 '산업의 쌀'인 쇠를 공급하며 '제조업의 제국(帝國)' 독일을 건설해 왔던 티센, 회슈(Hoesch), 크룹 등 철강업체는 이제 경쟁업체에 밀려나 통합된 회사 하나로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검은 빛깔이 감도는 회색 건물은 독일의 경제기적이 머나먼 과거의 일이었던 것처럼 을씨년스럽기조차 했다. 모회사인 티센크룹AG가 발행한 채권이 올해초 국제 신용평가회사인 S&P로부터 투기등급인 정크(junk)채권 판정을 받고 일부 사업을 폐쇄할 만큼 이 회사의 경영여건은 좋지 않다. 최근 들어 핵심사업에 주력하면서 예전보다 상황은 나아졌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데에는 한계가 느껴졌다. 뒤셀도르프에서 남동쪽으로 15㎞ 떨어진 조그만 도시 힐덴(Hilden)은 전통적인 가족기업과 소기업이 몰려 있는 곳이다. 도로 인근에는 간판조차 사라져버린 공장 건물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다. 대각선으로 마주해 있는 2층짜리 공장 건물에는 '임대'를 알리는 공고판이 붙어 있었다. 지난 한햇동안 독일에서 3만7천여개의 기업과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고 올해 들어서도 하루에 수백개씩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힐덴의 한(Hahn) 거리에 있는 옴코(Omco)사를 찾아갔다. 코카콜라 유리병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금형 도구를 제작하는 업체. 미카엘 렌츠(Michael Lenz) 사장은 "3년 전에는 직원수가 90여명이었으나 지금은 50여명"이라며 "그나마 우리는 코카콜라 유리병을 만드는 금형을 독점 납품하는 업체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렌츠 사장은 "독일의 고임금과 환경처리비용 때문에 이제는 공장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며 "많은 기업들이 개도국으로 생산시설을 옮기고 있다"고 전했다. 독일의 기업들은 분명 예전의 강력했던 모습을 잃고 있었다. 자동차 화학 등 일부 산업에서는 다국적화된 독일의 제조업체들이 여전히 높은 기술수준과 품질로 앞서 나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상당수 독일내 기업은 지나치게 높은 노동비용과 세금, 각종 사회부담금으로 경쟁력을 잃고 공장을 딴 곳으로 옮기거나 문을 닫았다. 독일의 노동비용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쾰른 경제연구원의 조사 결과 독일(옛 서독지역 기준)의 시간당 노동비용은 2001년 기준 26.2유로(1유로=1천3백50원)로 미국(23유로) 일본(22.2유로) 영국(19.2유로)보다 많다. 이처럼 독일 기업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동비용을 부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노동자들이 세계 최고의 임금을 받는 것은 아니다. 연금보험 실업보험 의료보험 등 사회보장성 부담금과 직무교육비 등 '소득 아닌 비용'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독일 제조업체의 시간당 총노동비용 26.2유로중 비(非)임금 노동비용은 11.7유로로 전체 노동비용의 45%에 이른다. 이를 제외한 독일 노동자의 순수 임금은 14.5유로에 불과하다. 미국 노동자들이 받는 기본임금(16.6유로)에 못미치고 영국(13.4유로)과 일본(13.1유로)보다 조금 많은 정도다. 독일의 6대 경제연구소중 하나인 이포(Ifo) 경제연구소에 따르면 4인 가족중 한 사람이 일해서 월 2천유로를 받는 독일의 저소득층 가구는 세금과 사회부담금을 빼고 나면 월평균 1천9백유로를 손에 쥘 뿐이다. 반면 실업보험과 실업지원금 등 각종 사회복지 제도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은 월평균 1천6백∼1천9백유로의 수당을 받는다. 저소득 계층에서는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의 실제 소득에 거의 차이가 없다. 독일 노동자들로서는 굳이 일할 의욕을 갖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생산성이 급전직하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독일의 노동생산성은 지난 90년만 해도 미국에 앞서 있었지만 2000년에는 미국에 15%나 뒤처졌다. 독일 제조업 노동자의 월평균 소득은 지난해 2천8백16유로(독일 연방통계청)였다. 세금과 사회부담금을 제외한 실제 평균 소득은 약 2천3백유로. 실업자보다 20∼40% 정도 수입이 많다. 그러나 실업자로 살면서 짬짬이 부업으로 '슈바르츠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과 비교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암시장에서 한달에 5백∼1천 유로 정도의 수입을 올리는 실업자들이 독일에서 급증하고 있다. 실업자들이 더 잘 산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세계의 제조공장'은 과도한 복지제도와,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기업과 근로자들의 몸부림 속에서 심각하게 병들어가고 있었다. [ 한경ㆍ대한상의 공동기획 ] 특별취재반=김호영ㆍ현승윤ㆍ안재석ㆍ김병언 기자 hy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