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확한 비유나 인용은 직설화법식 해명이나 어설픈 이론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깊이 각인되게 마련이다. DJ정부에서 '부통령'으로 통하던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구속에 앞서 조지훈의 시 '낙화'로 복잡한 심경을 함축했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라며 "한 잎 차에 띄워 마시면서 살겠다"고 했다. 구조조정 전도사로 불렸던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도 백범이 읊었다는 서산대사의 시로 퇴임의 변을 대신했다.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에는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이쯤되면 서민들도 각박한 세상을 조금이나마 관조하며 살 여유가 생긴다. 우리네 '문사철(文史哲)'의 교양과 전통을 조금은 되새길 수 있을 법하다. 그동안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부적절한 입'들을 봐왔는가. 이번 주 금요일(25일)로 5년 같은 취임 5개월을 맞는 노무현 대통령도 요즘은 말을 아끼는 눈치다. 오히려 CEO(최고경영자)들을 불러 이례적으로 많이 듣고 그들을 '신주류'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못해먹겠다' 식의 어쭙잖은 유머로 설화(舌禍)를 자초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프로야구 올스타전 시구, MBC '느낌표' 출연 등 민초들에게 다가서려는 행보가 자주 엿보인다. 구체적인 액션플랜을 담지 못한 '2만달러 구호'도 다소 조심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나라 안팎에서 오가는 말들은 여전히 강퍅하다. 굿모닝시티 게이트로, 대선자금으로, 새만금으로, 비무장지대 총격사건과 북핵문제 등으로 연일 고성이 들끓고 있다. 말 때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여당 부대변인으로부터 구강청정제와 초등학교 2학년 바른생활 교과서를 퀵서비스로 배달받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노동계는 주5일 근무 관련 정부안 입법저지를 위한 총파업을 예고(23,24일)하며 다시금 확성기를 키우고 있다. 나라에서 '배 아픈 것'을 해결해 준다고 했으니 너도나도 목소리만 커졌다. '성장이냐 분배냐' '유럽식이냐 영미식이냐'는 공허한 논쟁 속에 이 땅의 젊은이 4명중 1명은 '백수'가 됐고 신용불량자는 다달이 사상 최대치를 경신 중인데 말이다. 이제는 모두들 주장을 접어두고 조용히 앉아 서로 얘기를 들어봤으면 한다. 앞으로 먹고 살 거리를 찾아보려는 '차세대 성장산업 국제회의'(24,25일)에 참석할 세계 석학들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 경제부 차장 ohk@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