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의 현명관 부회장이 21일 대선자금 공개를 제의한 노무현 대통령의 기자회견 직후 기자간담회를 갖고 재계의 대선자금 자발적 공개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은 재계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재계는 "기업의 투자의욕을 되살리려는 정책이 아쉬운 상황에서 또다시 정치의 불똥이 튀게 될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현명관 부회장은 "기업들이 최근 윤리경영ㆍ정도경영ㆍ투명경영을 대외에 천명하는 것도 바로 부정한 비자금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의 제안에 대한 재계의 입장은 현 부회장의 기자간담회 내용 그대로다. 대선자금 지원 내역을 공개하면 규모가 크든 작든 기업으로 비난의 화살이 집중될 게 뻔한데 왜 공개를 하느냐는 것이다. 재계는 그러면서도 노 대통령의 대선자금 공개 제의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촉발된 갈등이 증폭돼 기업들로 파장이 번질 경우 대외신인도 추락과 그에 따른 주가 하락 등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예로 보아 '어느 기업이 얼마를 냈다더라' 식의 유언비어와 '살생부' 등이 나돌 것이 뻔해 자칫 자금조달에 애로가 발생할 우려가 크다는게 재계의 걱정이다. 재계는 특히 노 대통령이 이날 언급한 '기업들의 자발적 공개'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다. 노 대통령이 "자발적 공개가 여의치 않을 경우 수사는 하되 자금을 제공한 기업이나 기업인은 철저히 비공개로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선은 그었지만 정치권에서 해결하지 못할 경우 재계로 불똥이 튀어 결국에는 기업들만 속죄양이 될 공산이 크다고 보고 있다. 정치자금에서 자유롭지 않은 기업들에 유무형의 압박이 가해질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기업의 투명성과 신뢰도에 흠집이 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기업들의 불만은 결국 정치자금에 관한 한 기업도 피해자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도 "이번 대선자금 문제는 정치권과 검찰이 '결자해지'의 입장에서 해결해야 할 것"이라며 대선자금 문제가 재계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관계자는 "기업의 정치후원금 공개는 기업의 정치에 대한 예속성을 강화시켜 기업활동에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며 정치자금 공개 논란이 경제에 줄 수 있는 악영향을 걱정했다. 대기업 그룹은 극도로 말을 아꼈지만 공개 방침에는 아주 부정적이다. 삼성그룹은 정치자금 제공에 관한 내용을 공개하는 방안에 대해 달리 할 말이 없다는 입장이다. 삼성 관계자는 "정치자금 공개에 대해서 언급할 상황이 아니다"며 "다만 정치자금법에 의한 합법적인 절차를 거친 것 외에는 따로 밝힐 것이 없다"고 말했다. LG그룹이나 현대자동차그룹 등도 삼성과 마찬가지로 지난 대선 때 법에 의한 정당한 정치자금만 제공한다는 방침을 고수한 만큼 더 이상 밝히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기업들이 우려하는 것은 정치자금 공개 문제가 기업신뢰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모 대기업 관계자는 "안냈다고 해도 안믿을 거고 냈다고 하면 회계 처리를 제대로 했는지를 문제 삼지 않겠느냐"며 "어떤 경우든 기업은 비난의 화살을 받게 돼 있다"고 지적했다. 다국적 합작사가 많은 그룹의 한 관계자는 "조금이라도 정치자금을 낸 것이 밝혀지면 다국적 파트너들에게 신의성실의 원칙을 어겼다는 비판을 받을까 두렵다"고 말했다. 권영설 경영전문기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