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실패'에서 배운다] (8) '깊어지는 통일 후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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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베를린 장벽은 밑돌만 남아 있을 뿐 주차장으로 바뀌어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동ㆍ서 베를린의 통로 겸 검문소였던 '체크포인트 찰리'는 높게 걸린 사진 간판을 빼고는 여느 베를린 거리와 다를게 없었다.
분단의 상처로 얼룩졌던 포츠담 광장도 소니센터와 백화점들이 들어선 번화가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독일인들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분단은 오히려 골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2003년 6월과 7월 만나본 독일인들은 대부분 '동독과 서독' 문제를 얘기했다.
'통일' 때문에 독일 경제가 망가졌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독일은 통일된지 13년이 흘렀는데도 주요 통계들을 '동독'과 '서독'으로 구분해 발표하고 있다.
연방통계청이 발표한 전체 실업률은 지난 6월 10.2%.
이중 옛 서독은 8.1%, 옛 동독이 18.3%였다.
동독지역 실업률이 서독지역보다 배 이상 높았다.
임금에서도 동ㆍ서독간 격차는 컸다.
지난해 제조업 평균임금은 옛 서독지역이 시간당 15.17유로였으나 옛 동독지역은 10.66유로에 불과했다.
동독지역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이 서독지역의 70% 수준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작년 동독지역 노동자들의 주당 근로시간은 39.6시간으로 서독지역(37.6시간)보다 많았다.
경제 측면에서만 본다면 독일은 '여전한 분단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진 각종 통계들은 독일 분단의 골이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독일 정부는 지난 13년동안 동ㆍ서독지역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 많은 돈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서독지역 국내총생산(GDP)의 4%에 해당하는 돈(작년기준 약 8백억유로)이 옛 동독쪽으로 흘러들어갔다.
서독지역이 매년 1백여조원의 자금을 옛 동독에 지원해 왔다는 얘기다.
정부는 또 동독지역에 입주하는 기업들에도 많은 특혜를 주고 있다.
그런데도 동ㆍ서독간 격차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옛 서독인들의 불만이 클 수 밖에 없다.
게르하르트 펠스 쾰른경제연구원 연구실장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10배나 많은 돈이 동독지역에 투입됐다"며 "그런데도 동ㆍ서독지역간 격차를 해소하는데 실패한 것은 지원예산의 대부분이 비생산적인 분야에 쓰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독지역 주민을 서독지역 주민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원칙을 무리하게 적용하다보니 사회복지비 지출이 과도하게 늘어났고 그 결과 기업들의 생산성 향상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독일 정부의 대(對)동독지역 정책들은 상당부분 시장원리를 무시한 것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독일은 통일이 이뤄지기 3개월 전인 1990년 7월 동ㆍ서독 통화를 통합하면서 교환비율을 1 대 1로 정했다.
동독을 흡수통일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에 대한 정치적인 배려가 불가피하다는 논리에서였다.
동독지역의 자산과 부채에 대해서만 2대1의 교환비율을 적용했다.
문제는 당시 동독 통화의 시장가치가 서독의 10∼20%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실을 무시한채 1대1로 정해진 통화교환 비율은 동독 통화의 평가절상을 뜻했다.
동독 기업들은 가격경쟁력을 상실했고 부도사태가 이어졌다.
국가 소유였던 동독 기업들의 부채는 고스란히 정부 채무로 이전됐다.
독일 사용자연합회(DBA)와 노조연맹(DGB)은 동독지역 노동자들의 임금을 1994년까지 서독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내용의 단체협약을 맺었지만 애초부터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동독지역의 임금 상승률은 1992년 35%에 달했고, 93년에도 15%를 기록했다.
그러자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던 동독 기업들이 고임금 부담을 견디지 못해 하나둘씩 무너졌다.
2000년까지 동독지역에서는 제조업 분야에서만도 기업 파산과 해고 등으로 1백만명 이상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결국 동독지역 노동자들은 대부분 단체협약에서 탈퇴했고 저임금을 받아들였다.
정부는 동독지역에서 급증하는 실업자들과 연금수령자들을 위해 막대한 재정을 지출했다.
그 결과 기업과 노동자들이 내야 하는 세금과 사회보장성 부담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90년대 초 법인세와 개인소득세에 7.5%의 통일세가 부과됐고 유류세와 실업보험료가 인상됐다.
14%였던 부가가치세도 1%포인트 인상됐다.
독일 정부는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1년 세제개혁을 단행했다.
GDP의 1%에 해당하는 세 부담을 줄이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세금이 줄어든 만큼 정부 지출을 줄이지는 못했다.
그 결과 독일 정부의 재정적자는 지난해 GDP의 3.6%로 EU(유럽연합)의 재정안정화 기준(3% 이내)을 넘어섰다.
루트비히 게오르크 브라운 독일 연방상공회의소 회장은 "서독 정부는 통일 당시 동독의 경제력이 공산진영에서 2위였다는 사실을 과대 평가했다"며 "동독은 썩어 있었고 기업문화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독일은 92년 세계 2위였던 국가경쟁력(스위스 IMD 평가)이 지난해 15위로 밀려났다.
'통일' 변수는 독일 복지제도의 문제점과 한계를 재점검하고 고치는 기회로 활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서독의 복지제도를 동독에 이식하는 데에만 주력했다.
독일 경제를 망가뜨린 주범은 '통일'이 아니라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었다.
특별취재반=김호영ㆍ현승윤ㆍ안재석ㆍ김병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