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은 지난 22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민경국 강원대 교수(경제무역학부)가 토론자로 참석한 가운데 신상민 본사 논설주간의 사회로 '2만달러 시대의 조건, 독일의 실패에서 배운다' 결산좌담회를 가졌다. 토론자들은 독일의 실패를 따라가지 않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김 부총리는 "대형 노동조합들이 과잉보호되고 있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고 박 회장은 "정부는 현행 노동법이라도 철저하게 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 교수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시장 유연성을 극대화한 미국식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 참석자 ] 김진표 <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 > 박용성 <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 민경국 <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 신상민 < 한경 논설주간 (사회) > ----------------------------------------------------------------- △ 사회 =독일 경제가 실업률은 10%를 넘었고 경제성장률은 3년째 0%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등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 민경국 강원대 교수 =잘못된 노동정책의 탓이 큽니다. 엄격한 해고규정과 노동자들의 과도한 경영참여, 강력한 산별노조 등으로 독일의 노동시장 유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 가운데 꼴찌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지나친 복지제도 역시 독일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 김진표 경제부총리 =유럽연합(EU)을 탄생시킨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독일은 독자적인 통화정책이나 재정정책을 펼칠 수 없게 됐습니다.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억제해야 하기 때문에 경기가 침체되더라도 독일 정부는 손을 놓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 사회 =그런데도 정부는 독일을 포함한 유럽식 경제모델에 애착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수를 자처하는 한나라당 지도부에서도 독일식 근로자 경영참여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요. △ 김 부총리 =정부가 특별히 독일 경제를 모델로 삼겠다고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 네덜란드의 노사정위원회 모델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이후 독일 경제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네덜란드 경제모델을 거론한 것은 논의 차원일 뿐 정부의 정책방향이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책임있는 당국자의 입을 통해 나온 얘기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많은 기업인들은 정부의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려운 회사일수록 신제품을 자주 내는데, 그만큼 잘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중구난방식으로 의견을 개진해서는 곤란합니다. 신문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해질 때가 많습니다. △ 김 부총리 =정부내에서 여러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과거 정부때처럼 한쪽 방향으로만 몰고 가는 것도 좋지 않다고 봅니다. 반대세력이 체제의 저편에 서서 저항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과도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정답을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 민 교수 =그러나 학자들조차 분석하기 어려운 얘기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노사문제에 대한 정부 관계자들의 정리되지 않은 주장들은 기업의 불안감을 증폭시킵니다. 기업들의 투자계획이 서랍속으로 들어간 것도 이 때문입니다. △ 사회 =국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노동정책에 관한 정부의 원칙이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는 지적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 김 부총리 =정부는 국내 노동환경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출 방침입니다. 우선 대규모 조직 노동자들의 지나친 특권의식을 바꿔야 합니다. 노조 전임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국제기준에 어긋나므로 바로잡을 생각입니다. 무(無)노동ㆍ무(無)임금 문제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정착돼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 쫓겨나면 직장을 잡기가 어려운 한국적 현실을 감안해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여건은 최소한의 보장이 이뤄질 수 있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 박 회장 =정부는 국내 노사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업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노동정책의 구체적인 방향은 무엇이며 어떤 순서로 언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구체적인 '로드맵'이 필요합니다. 외국인 투자자들도 "약속은 더이상 필요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행계획을 보여 달라는 얘깁니다. △ 김 부총리 =노동정책에 대해서는 관련부처에서 실무안을 거의 완성했습니다. 노사정위원회 협의를 거쳐 늦어도 8월15일까지는 큰 그림을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사회 =국내 기업들이 노조의 파업에 대항할 수 있는 실질적인 무기가 없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어느 기업도 직장폐쇄라는 카드를 마음대로 꺼내들 수 없는게 현실입니다. △ 박 회장 =직장폐쇄는 고사하고 노조가 파업을 할 때 대체근로자조차 쓸 수 없어요. 노조가 정문을 봉쇄하고 생산설비 부속품을 빼내가 공장가동이 멈추는 사례도 많습니다. 정리해고는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기업들이 정부에 바라는 것은 단순합니다. 최소한 법에 규정돼 있는 것만이라도 제대로 집행해 달라는 것이지요. △ 김 부총리 =정부 역시 법과 원칙이라는 테두리안에서 노사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자율적으로 분쟁을 해결하도록 유도하되 범법행위는 반드시 처벌한다는 것이 정부의 일관된 방침입니다. 그러나 노사정위원회는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철도 지하철 같은 기간망 산업과 금융산업 등 이해관계나 근로조건이 비슷한 일부 업종에서는 별도의 노사정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 논의하는 것이 효율성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 사회 =독일의 경제를 멍들게 한 주요 원인으로 평등을 중시하는 독일식 교육제도가 자주 거론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육시스템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 민 교수 =독일에서는 교육문제에 대해 자성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인적자본 형성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독일의 대학중에는 세계 최고의 반열에 끼어 있는 대학이 하나도 없습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 교육시스템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과학부문 노벨상의 50% 가량을 독일인이 휩쓸었고 베를린 의과대학생의 40%가 미국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독일 학생들중 상당수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있습니다. △ 김 부총리 =한국의 교육시스템을 경쟁논리에 따라 개혁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교육제도는 학생이나 학부모 기업 등 수요자가 아니라 공급자인 교사 위주로 돼 있습니다. 교육은 수요자의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하는 곳에서 맡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재정과 교육재정이 하나로 통합돼야 합니다. 이렇게 바뀌면 지방 자치단체장 선거에서 교육문제가 주요 이슈로 부각될 것이고 교육계에 경쟁의 바람이 불게 될 것입니다. 평준화 정책으로 고교 입시 선발은 없어졌지만 돈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명문고가 모이는 부작용도 생겼습니다. 시험으로 선발할 때보다 더 나쁜 현상입니다. △ 박 회장 =독일에서 절대로 배우지 말아야 할 부분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불행하게도 독일과 닮아가고 있습니다. 독일어를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나라들을 제외하면 한국 대학들의 독어독문학과 숫자가 세계에서 가장 많습니다. 반면 일본어나 중국어를 가르치는 학교는 매우 적습니다. 심지어 서울대학교에는 일본어 학과조차 없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머리를 써야 하는데 입시기술자들만으로는 2만달러 달성이 요원하다고 봅니다. 기업이나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만들어내는데 주력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부가 교육 개혁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 사회 =올해 경제상황을 어둡게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국도 독일처럼 장기침체로 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지요. △ 박 회장 =경제는 심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제 일생에 지금처럼 금리가 낮았던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업투자가 부진합니다. 기업들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확신하면 사채라도 끌어다 씁니다. 문제는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으로 재정지출을 늘린다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돈들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일본은 경기회복을 위해 엄청난 규모의 돈을 쏟아 부었지만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과 상관없는 전시행정에만 치우쳤습니다. △ 민 교수 =법인세를 아예 없애는 방안도 고려해 봐야 합니다. 법인세는 이중과세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다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도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 김 부총리 =세계 어느 나라도 법인세를 폐지한 곳은 없습니다. 최대 경쟁국가인 중국보다 한국의 법인세가 아직은 낮은데 만약 중국이 법인세를 낮추게 되면 우리도 법인세를 인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정리=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