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식 삼일회계법인 명예회장(65)은 한국 회계업계의 산 증인으로 통한다. 35세에 회계법인을 세워 국내 최대 규모의 기업으로 키웠고 이 회사를 통해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다. 서 명예회장은 30년동안 지켜온 삼일의 대표이사 자리에서 최근 물러났다. 요즘 오랜만에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다는 그를 만났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하지만 대표이사 라는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니 마음은 홀가분합니다.일에만 빠져 가정에 소홀히 했던 점이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습니다." 서 명예회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중이던 1962년 제8회 계리사 시험에 합격,회계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제 합격증 번호가 31번 입니다.7회까지 총 합격자수가 30명밖에 안됐죠.지금 생각하면 시험문제는 초보적이었는데도 당시엔 어려웠는지 합격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지난 65년 회계사 개업을 할 때만 해도 상장법인의 감사인은 재무부장관이 지정했다고 소개한 그는 당시 감사인 지위는 대단했고 나라를 위해 봉사한다는 사명감도 높았다고 말한다. 20대 후반의 계리사가 '영감님'소리를 들으며 감사를 하던 '괜찮은'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과거엔 엉성하기 짝이 없는 감사조서를 작성하는 회계사도 적지 않았고 금융감독원 회계감리국도 이같은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서 명예회장은 "주변 상황이 크게 달라졌는데도 금감원은 아직도 감리를 통해 무더기 징계를 내리고 있다"며 "이런 사실이 해외에 알려지면서 한국의 회계 투명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평가를 받는 실정이 안타깝다"고 강조했다. 삼일이 국내 최고의 회계법인으로 우뚝 선 밑바탕에는 서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인 '도장론'과 '제일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삼일(三逸)'은 회계감사 세무 경영컨설팅 세가지(三)업무를 빼어나게(逸) 잘 하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는 신입 회계사를 만날 때마다 "삼일이라는 '도장(道場)'에 입문했다"는 '도장론'을 역설하곤 했다. 돈을 버는 직장을 떠나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키워가고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배움의 터'라는 의미다. 이 이름을 사용케 된데도 사연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삼일의 전신인 라이브란회계법인이 설립된 것은 1971년. 제휴법인인 '라이브란(PwC의 전신)'이란 이름을 썼는데 공인회계사회에서 외국 이름을 쓰지 말라는 결정을 내린 것. "지금 회계업계에서 삼일이라는 브랜드 가치는 상당합니다.이름을 바꾸지 않았다면 라이브란에서 프라이스워터하우스(PwC)로 계속 이름을 바꿀 뻔 했습니다." 그는 직원들과의 술자리에서 '위하여' 대신 'Best in all'이라고 외친다. 제일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number-one-ism'이라는 단어는 PwC에서도 쓰는 사람이 생겨날 정도로 삼일의 대표 구호가 됐다. 서 명예회장은 신시장을 개척하는데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대표적인 것이 반덤핑서비스. "80년대초 금성사(지금의 LG전자)가 미국 상무부로부터 컬러TV 반덤핑조사를 받게 되자 경리부를 도와 영어통역을 해줄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그런데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이 분야 전문가인 김일섭 회계사(현 이화여대 부총장)에게 일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철저한 분석과 자문을 통해 금성사의 반덤핑 혐의가 미미하다는 판정을 받아냈습니다." 지난 78년 삼성그룹의 결합재무제표 작성업무를 맡은 것도 삼일이 다시 한번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서 명예회장은 '할복(割腹)'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법인의 명예나 재산을 자신의 생명처럼 중시하자는 뜻을 강조하기 위한 의미다. 그는 "신뢰받는 회계법인이 되려면 확고한 윤리성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앞으로 회계업계와 후배 회계사를 위해 봉사하는 시간을 가질 생각"이라고 밝혔다. 글=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