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헌 회장의 자살은 너무도 돌발적이어서 가족들은 물론 측근 인사들도 큰 충격을 받고 있다. 최측근 인사인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은 4일 "대북송금 특검과 비자금 사건 수사를 받으면서 괴로워하기는 했지만 이처럼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애통해 했다. 아산병원 영안실에서 유가족들을 만난 현대차그룹 고위 임원도 "직계 가족들도 사전에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며 "정 회장이 충동적으로 목숨을 끊었다기 보다는 조용하게 신변을 정리한 뒤 떠나겠다는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우선 정 회장이 자살을 결심하게 된 데는 최근 강도 높은 검찰수사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9월 국정감사에서 대북송금 파문이 터진 이후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겪어온 정 회장으로서는 지난달 말 시작된 대검 중수부의 '현대그룹 비자금 수사'로 한계상황까지 내몰렸을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정 회장은 지난달 26일과 31일, 지난 2일 등 세 차례 대검 중수부에 은밀히 소환돼 그때마다 12시간 이상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검찰이 짧은 기간에 몰아치기로 소환할 만큼 다급하게 추궁할 뭔가가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토요일인 지난 2일 세번째 소환 조사를 받은지 하루만에 자살을 결행한 점이 주목된다. 한 검찰 간부는 "현대 비자금 1백50억원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예상 밖의 혐의가 드러났을 수도 있다"고 관측했다. 정 회장이 유서에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고 적은 것도 검찰의 집요한 추궁에 파장이 큰 어떤 혐의를 자백하고 뒤늦게 후회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현대그룹 모 임원이 검찰에서 강도 놓은 비자금 수사를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며 "특검에서 드러나지 않은 거액 비자금이 나왔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정 회장과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양도성 예금증서(CD)로 줬다"고 주장한 1백50억원이 정치권으로 흘러간 단서를 검찰이 포착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대검의 비자금 수사가 현대그룹 계열사의 분식회계 쪽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압박감이 컸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정 회장 자신이 2000년부터 대북송금 등으로 빠져 나간 돈을 분식회계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초대형 회계조작 사건으로 비화할 것을 걱정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 문효남 대검 수사기획관은 이날 "정 회장을 소환할 때마다 변호사들이 함께 왔고 마지막 조사 때는 담당 변호사와 식사도 같이 하도록 배려했다. 다른 사람과 대질조사를 한 적도 없고 대담식으로 조사가 이뤄졌다"며 검찰 수사를 자살의 직접 원인으로 연결시키려는 시각을 경계했다. 누적된 피로감도 정 회장의 마음을 허무는데 일조한 것 같다. 정 회장은 지난 2000년 이후 현대건설 하이닉스 현대석유화학 현대투신 현대종합상사 등이 잇따라 부실화하자 끊임없는 경영책임론에 시달려 왔다. 지난달 23일부터 25일까지는 북한 금강산을 방문해 육로관광 일정을 협의한 뒤 곧바로 검찰에 출두하는 등 개인적으로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나날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남북경협에 대한 엇갈린 평가도 정 회장의 심리적 압박을 가중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김후진ㆍ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