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항쟁 이후 정부가 국가방향 주도의 힘을 상실했다." 장·차관급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주에 열렸던 2차 국정토론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 말이다. '국가진로에 대해 국민의 수임을 받은 조직'인 정부가 국가방향을 주도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이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던진 이 엄청난 화두(話頭)가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지도 않다. 이미 그렇게 된지가 어제 오늘이 아니기 때문에 별로 놀랍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민주주의란 게 그런 것이라고 잘못 생각들 하기 때문일까. 정부가 국가방향주도의 힘을 잃은 것이 87년 6월부터인지는 시각에 따라 얘기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정부와 집권여당이 분명한 자기 철학을 갖고 국정방향을 끌고가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엎치락뒤치락했던 YS정권 때의 노동법 파동도 비슷한 유형으로 볼 수 있고, DJ와 참여정부의 주5일제 대응방식은 더욱 그런 측면이 두드러진다. 근본적으로 이해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 노사의 합의만 종용하는 것은 국정을 주도할 의지를 갖고 있는지조차 의문을 갖게 한다. 바로 그런 점에선 야당을 포함한 정치권 전체가 마찬가지다. 이해당사자간 합의가 없다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정치라면 그 것이 왜 필요한지 생각해볼 일이다. 계층과 집단간 대립에서 구경꾼에 불과하다면 조정과 통합이라는 정치 제1의 덕목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 대통령은 "국민선거로 선출된 국회, 정부가 국정주도의 힘과 자율성을 상실하고 타율적으로 이끌리면 선거·민주주의 기능이 위기에 처한 것"이라고 말했다. 제대로 된 현실인식이고 옳은 말씀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기만 한가. 정부의 위기,그 대표성과 합법성의 권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국가위기로 이어질게 자명하다. 오늘의 상황이 그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국면이라면 이 문제는 대통령이 풀어야 할 일이다. 언제부터 정부가 국가방향 주도권을 잃었든,이제 그것을 되찾는 일은 현직 대통령이 해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대통령 스스로 현안이 되고 있는 갈등에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고, 그래서 욕과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DJ정권 때 낸 주5일제 법안을 국회의 선처만 바라며 기다려서는 국정방향을 능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주도한다고 보기 어렵다. 한·칠레 FTA 비준안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만 어느나라와도 FTA협정을 맺지 않아도 좋은 상황이 아니라면,엄청난 농민 반발을 누가 나서서 무마하고 설득할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국회에 법안만 내면 정부 할 일을 다했다는 얘기는 절대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정도라면 정부제출법안이 시민운동단체(NGO)들이 낸 입법청원과 다를 게 무엇일까. 방향, 곧 선택을 분명히 하고 확고한 의지를 갖고 이를 밀어붙이는 국정운영이 돼야 한다. '코드'에 못지않게 이 정부 들어 '로드 맵'이 유행어가 됐지만, "갈 곳도 정하지 않았는데 길 지도가 왜 필요한가"라는 우스갯소리도 없지않다. 비아냥이라고 불쾌해 할 것만은 아니다. 오늘 이 사람 말하는 것과 내일 저 사람 말하는 것이 다르고,같은 사람 말도 듣기에 따라서는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법인세 관련발언만 되새겨 보더라도 그렇다. 정책당국자의 말은 분명해야 하는데,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혼선이 없지 않은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정치권이 집단간 갈등이 얽힌 문제에 비켜서는 까닭은 매우 복합적이다. 정책 컬러가 불분명한 정당구조,아무리 잘해야 반타작이고 어쩌면 잃는 게 더 많을지도 모르는 표계산도 한 요인임에 분명하다. 여기에 이론무장 부재현상이 겹친다고 봐야 한다. 우리 국회에서 경제문제와 관련,논전(論戰)다운 논전이 빚어진 적이 없다는 점은 뒤쪽 요인의 중요성을 말해준다고도 볼 수 있다. 정부와 국회가 국정을 주도하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그런데서 찾을 수 있다. 눈앞의 표만 볼 뿐 다음 세대는 의식하지 않는 정치,국정방향을 제대로 설정할 지적 능력도 없는 정치인 수준이 어쩌면 오늘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인지도 모른다.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