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의 제조업 기반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1960년대 한때 반짝했던 제조업은 64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의 실정으로 명맥이 끊겼고 알짜배기 공기업들은 모조리 외국계 기업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브라질 내수시장을 노리고 들어온 다국적 기업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목적에 충실했다. 정부는 다국적 기업들이 미국이나 유럽시장으로 수출을 늘려줄 것을 원했지만 항상 그들의 주된 관심은 내수시장 점유율이었다. 그 결과 지난해 수출(6백3억달러)이 총 GDP(국내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3.4%에 불과했다. 그나마 2년전의 9.2% 보다 많이 높아진 수치다. 성장 잠재력을 찾아볼 수 없는 내수시장, 취약한 국제경쟁력, 금리와 환율의 지속적인 불안. 대통령으로서 룰라가 처음 받아든 '패'는 형편없었다. 도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를 정도였다. 룰라는 취임후 IMF가 요구한 경제프로그램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외환위기 국면에서 지난 98년 집권했던 김대중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대통령이 되기 전, "IMF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면 신이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했던 태도는 사라졌다. "브라질은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해야 한다"며 국제사회를 긴장시켰던 것도 그야말로 옛날 일이 됐다. 첫 조치는 금리 인상이었다. 룰라는 주요 지지계층인 노동자와 서민, 심지어 노동당 핵심 간부들까지 반대했던 IMF의 고금리 처방을 받아들였다. 2000년 연 15% 수준이었던 콜금리는 올들어 26%까지 치솟았다. 룰라도 금리가 살인적인 수준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인플레를 잡아야 하고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절감하고 있었다. 룰라는 지난 2월 인플레를 '바이러스'에 비유하며 금리 인상을 지시했고 코엘러 IMF총재는 "용기있는 결단"이라고 치켜세웠다. 브라질 현지에 진출해있는 이탈리아 우유업체 팔마라트의 지잘마 곤살레스 바르보사 인력팀장의 얘기. "현재 브라질 기업들의 능력으로는 고용을 더 늘릴 수 없는 형편입니다. 신뢰를 회복해 외국자본을 끌어와야만 일자리가 생기고 인프라도 늘릴 수 있습니다. 외국기업에 종사하는 입장에서 보면 룰라 대통령은 장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기적인 희생은 감수할 수 있다는 실용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은 몰라도 2∼3년쯤 지나면 큰 효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고금리를 유지하기 위한 통화긴축은 기업인들로부터도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실질금리가 연 80%를 넘는 수준에서 자금력이 취약한 중소기업들이 무더기로 도산한 것. 해외에서 저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다국적 기업과 달리 브라질 토종기업들의 경쟁력은 현격한 열세에 놓이게 됐다. 상파울루 도소매연맹의 장 클로드 실버펠트 이사는 "금리가 치솟으면서 국내 기업들의 각종 할부판매가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며 "IMF의 권유라고는 하지만 중소업체들을 살인적인 고금리에 방치하는 것은 정부의 실책"이라고 비판했다. 분명 룰라는 지금도 고금리 정책으로 인해 좌파와 우파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중적 인기는 여전하지만 우파 성향의 일부 지식인들이나 극좌파들은 '그가 결국 아무 것도 이뤄내지 못할 것'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룰라가 '친노(親勞)'도 '친기업(親企業)'도 아닌 현실 위주의 정책을 펴고 있다고 봐야할지도 모른다. 브라질의 유력지 '에스타도 데 상파울루'의 정치평론가 길베르토 데 멜로 쿠야와스키의 평. "룰라 대통령은 우파에 당혹감을 안겨주고 좌파를 화나게 만들고 있다. 우파는 대통령의 진지성을 의심하고 좌파는 그가 사회주의 경제시스템의 대의를 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룰라 대통령은 어느 편에도 서 있지 않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이데올로기의 구속으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에 대한 룰라의 접근방식은 유연하면서도 간단하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바꾸고 흐름이 끊기는 곳이 있으면 뚫어준다. 우선 고용의 주체인 기업 규제를 철폐하기 시작했다. 과거 석달씩 걸리던 기업 설립절차를 사흘 이내로 줄였다. 인터넷을 이용함으로써 민원인이 관청을 찾아오지 않아도 되게 했다. 특히 중소기업들을 위해 수출세를 면제해 주고 각종 세금도 깎아줬다. 산업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인프라를 구축하고 개발금융에 대한 국가의 전략적 역할을 강화하는 방안도 모색하기 시작했다. '수출드라이브 정책'도 성장을 위한 룰라의 카드였다. 이웃 나라 아르헨티나는 수출에 부과하는 세금을 새로 도입했지만 룰라는 수출세를 폐지했다. 뿐만 아니라 수출업체들을 지원하기 위한 보조금 정책을 입안했다. 재정 적자탈피가 '발등의 불'인 상황에서 세수를 포기하고 오히려 정부재원을 지원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는 다국적 기업들의 각축장으로 변해 버린 내수산업의 체질을 바꾸고 산업구조 고도화를 추진하기 위해선 수출중심의 산업구조 재편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동안 브라질이 만져본 달러는 주로 공기업 매각이나 소비ㆍ유통산업 부문의 외자유치, 원자재 수출이나 관광수입 등을 통한 것이었지 제조업 중심의 수출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실질적이고 탄력적인 룰라 정부의 수출정책은 지난 상반기에 눈부신 실적으로 나타났다. 무역흑자만 1백억달러. 1990년대 이후 지속돼오던 만성적인 무역적자 구조에 일단 마침표가 찍히는 분위기다. 상파울루=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