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현대그룹 원포인트 릴리프..정상영 KCC명예회장, 가족회의 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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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사망으로 사령탑을 잃은 현대그룹의 향후 경영권 문제는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 명예회장(68)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유난히 가족간의 우애가 강하고 범(汎) 현대그룹 계열사에 폭넓게 지분 출자를 해놓았을 정도로 자금력이 있는 정 명예회장이 '현대가(家) 지킴이'로 나섰기 때문이다.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막내동생인 정 명예회장은 얼마 전 '현대그룹 가족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외국인투자자들이 현대그룹의 지주회사인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빠른 속도로 매집해 들어와 적대적 기업인수·합병(M&A)설이 퍼지고 있을 때였다.
조카인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과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생질인 김윤수 한국프랜지 회장(정상영 명예회장의 누나인 정희영씨의 아들) 등이 참석했다.
정 명예회장은 이 자리에서 "이번 건은 가족들이 공동으로 나서 대처하는 게 좋겠다"고 간단하게 결론내렸다.
그는 "조카(정몽헌 회장)가 일찍 유명을 달리한 것도 가슴 아픈데 회사는 지켜야 할 것 아니냐"며 "모두 힘을 모으자"고 독려했다.
현대 일가의 결속은 지난 13일 KCC의 계열사인 금강종합건설을 비롯 현대백화점 한국프랜지 현대시멘트 등이 현대엘리베이터의 자사주 43만주(7.7%)를 인수하는 것으로 당장 나타났다.
◆현대그룹 파수꾼 자처
정 명예회장은 이번 지분 매입뿐만 아니라 정몽헌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경영권 공백상태에 빠진 현대그룹을 '보호'하는 일에도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상선 현대택배 등 계열사들의 자율경영은 그대로 유지하되 어떤 형태로든 오너십이 도전받는 상황이 닥치면 단호히 대처한다는 생각이다.
현대가의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당분간 정 명예회장이 정몽헌 회장 계열사들에 대해 '원 포인트 릴리프(one point relief:일시 구원투수)'역할을 할 것"이라며 "과거에도 음으로 양으로 많이 도왔던 만큼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 포인트 릴리프'는 야구용어로 한 점 승부가 아쉬운 위기상황에서 등판해 상대방의 핵심 타자를 상대하고 내려가는 투수를 일컫는다.
따라서 이 용어대로라면 정 명예회장은 현대그룹의 차기 경영권 윤곽이 드러나기 전까지 외부로부터 현대그룹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얘기다.
◆범 현대계열사와의 끈끈한 관계
고 정주영 회장이 이끌던 현대그룹은 자동차 중공업 시멘트 보험사 상선·엘리베이터 건설 등으로 분리됐지만 KCC는 이들 각 계열사와 지분 투자관계를 맺고 있다.
이번에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확보한 것을 비롯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산업개발 등에 출자를 해놓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도료 유리제품 등을 주력으로 하고 있는 만큼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이들 기업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며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기본적으로 모든 기업들이 한 뿌리요,한 가족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KCC가 지난 6월 중공업 지분을 8.2%나 확보한 것은 내부 지분이 취약한 정몽준 현대중공업 전 고문을 측면 지원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는 설명이다.
◆현대그룹 경영권의 향배
정 명예회장은 좋든 싫든 향후 현대그룹 경영권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차기 현대그룹의 경영권은 고 정몽헌 회장의 장모인 김문희 여사의 엘리베이터 지분(18.6%)과 고 정몽헌 회장의 상선 지분(4.9%)이 어디로 이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김 여사의 지분 중 일부는 지난해 말 정몽헌 회장이 개인용도로 정 명예회장에게 2백90억원을 빌릴 때 담보로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정몽헌 회장의 상선 지분은 교보생명 등 금융회사에 담보로 맡겨져 있다.
이들 지분은 기본적으로 정몽헌 회장의 처가에서 처리방향을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정 명예회장이 개입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다.
졸지에 오너를 잃은 현대그룹으로서는 정 명예회장의 파수꾼 역할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처지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