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4 03:16
수정2006.04.04 03:20
한여름 무더위가 벌써 아침 저녁의 서늘한 바람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식을 줄 모르는 용광로처럼 달아 오르고만 있다.
한 고비를 넘기는가 싶었던 하투(夏鬪)는 '임금삭감 없는 주5일근무'를 요구하는 양대 노총의 총파업으로 재점화할 참이다.
한 대기업 총수의 목숨을 앗아간 정치권의 '비자금 수수께끼'는 갈수록 의혹을 증폭시키며 국정(國政)전반을 수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사태 수습을 주도해야 할 청와대와 여당은 잇단 권력형 스캔들과 '신당 창당'을 둘러싼 이전투구에 휘말려 제 앞가림에도 급급한 형편이다.
이런 판국에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하다.
대기업들은 '내몫 늘리기'에 충혈된 노조에 데어 투자와 신규 채용을 줄이고 있고,불똥을 맞은 중소기업들은 "IMF(국제통화기금) 신탁통치를 받던 5년 전보다 더 나빠졌다"고 아우성이다.
고용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아예 취업을 포기한 구직 단념자도 10만명을 넘어섰다.
노무현 대통령은 6개월 전 "2백50만개의 일자리를 새로 창출해 잠재성장률을 7%대로 올려 놓겠다"면서 임기를 시작했지만 일자리가 늘어나기는커녕 최근 1년새 취업자가 7만8천명이나 줄어들었다.
지금 같아선 '국민소득 2만달러'는 허황한 구호의 유희일 뿐이고 5%대의 잠재성장률이나마 제대로 유지될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주 기자가 몇몇 중견 대학 교수들 및 이코노미스트들과 함께 가진 비공개 포럼에서는 현재의 상황이 '리더십의 위기'요 '비전의 위기'라는 의견들이 쏟아졌다.
상황은 난세(亂世)로 치닫고 있지만 국정을 책임진 사람들로부터는 제대로 된 위기의식을 찾기 어렵다는 얘기도 나왔다.
오히려 야당쪽에서 경기침체를 방치할 수 없다며 일부 품목의 특별소비세 인하폭 확대와 근로소득세 감면을 주도한 데 이어 기업 투자를 되살리기 위한 법인세 연내 인하법안까지 내놓고,정부 여당은 이를 쫓아가기 바쁜 상황이다.
도대체 어느 쪽이 국정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런 참에 지난 주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입에서조차 "한국은 지금 리더십의 위기,리더십의 변환기에 직면해 있다"는 말이 나왔다.
"나는 지금 민주적,분권적 리더십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말 끝에 나온 얘기였다.
시국에 대한 고뇌를 '리더십 위기'라는 역설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은 해보지만 당혹감을 떨치기는 어렵다.
분권적 리더십이라는 것이 리더십의 부재를 호도하는 말의 유희가 아니기를 바라지만 돌아가는 정치정세를 보면 오히려 그쪽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민주주의는 곧 정당정치라고 하겠지만 집권당이 부재한 상황에서 대통령은 과연 무엇으로 정치를 해 가겠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혹여 신당을 만들고 그것으로 총선을 이긴 다음에 그때 가서 대통령 노릇 제대로 해보겠다는 생각이라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6개월이 모자라 내년 봄까지도 리더십의 부재,리더십의 위기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작년 12월 선출된 한국의 대통령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실로 딱한 질문을 연이어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세상을 놀라게 한 대통령의 손해배상 소송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안의 옳고 그름을 떠나 대통령이 지켜야 할 진실과 명예는 진정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통령은 나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며 법원을 찾고 있는데 국민들은 과연 누구를 찾아가 이 나라에 사는 고달픔을 호소할 것인가.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