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최초의 여성 대법관인 샌드라 오코너가 취임한 것은 1981년으로,사법제도가 도입된지 1백90여년만이었다. 최초의 흑인 대법관인 서긋 마셜이 존슨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것도 67년에 이르러서였다. 철옹성 같은 백인 남성 위주의 사법부 보수성을 뚫는 일이 쉽지 않아서였음은 물론이다. 지난 91년에는 토머스 클레어런스 흑인 대법관 인준을 둘러싸고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이 의회청문회에서 한바탕 전면전을 치르기도 했는데 성추행 의혹까지 제기돼 더욱 철저한 검증을 받았다. 연방대법원의 영향력이 크기때문에 대법관은 임명과정에서부터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올해도 2명의 대법관이 교체될 것으로 보이는데 누가 임명될 것이냐를 놓고 벌써부터 조야가 들썩거리고 있다. 현안을 둘러싼 사회갈등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대법원의 몫이어서다. 일본에서는 내각에서 최고재판소의 재판관을 임명하지만,임명후 첫 중의원 선거에서 그 신임을 묻는 '국민심사제도'를 통해 재판관을 검증하고 있다.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지 못하면 자리에서 물러난다. 국내에서도 사법사상 처음으로 대법관 인선을 놓고 문제가 불거져 사법파동으로 번질 조짐이다. 일부 판사들이 "소수자와 인권을 폭넓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좀 더 개혁적인 인사가 대법관에 임명돼야 한다"며 제청방식과 후보자 선정에 불만을 품고 사표와 연판장을 돌리며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대법원장 고유권한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며 맞서고 있으나 갈등을 봉합할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해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번 파문은 법원인사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의 충돌이기도 하다. 그런데 합당한 절차를 거쳐 선정된 인사를 몇몇 시민단체들과 함께 무조건 바꾸라고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국회 청문회를 통해 후보자를 검증할 수 있고 개혁문제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변화가 시대적 과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1백40여명의 서명판사 목소리 못지 않게,절대 다수의 판사들이 왜 침묵하고 있는지도 헤아려 볼 일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