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인구 1천만명의 유럽풍 도시로 '남미의 파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마로니에가 줄지어 선 거리에 넓고 울창한 공원,유럽풍과 현대식 건축물들이 한때 세계 5대 경제대국이었던 과거의 '영화'를 뽐내고 있다. 시내 쇼핑 중심가는 언제든 고급 유명 브랜드를 판매하고 있으며 플로리다 거리 중앙은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하고 있다. 하지만 서남쪽으로 20km쯤 떨어진 곳에 '루가노'라는 빈민촌에 이르면 분위기는 확 달라진다. 2만명 정도가 공동 화장실을 쓰며 모여 사는 이곳 주민들의 생계 수단은 다름아닌 도심의 쓰레기 통이다. 추운 겨울철에 먹을 것과 입을 것,돈으로 바꿀 수 있는 고물을 찾는 것이 하루 일과다. 이들은 요즘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당국에 '쓰레기통을 빨리 수거하지 말라'며 가두 시위를 벌이고 있다. 월 2백페소(70달러 상당)짜리 일거리도 없는 이들에겐 쓰레기통이 미처 차기도 전에 치워 가는 시 당국이 원망스럽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이른바 '남미병'의 대명사다. 흔히 '남미처럼 된다'는 얘기는 바로 아르헨티나의 추락을 두고 하는 경우가 많다. 1974년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돌파했고 지난 98년까지만 해도 8천달러에 육박하는 소득을 자랑했던 이 나라는 요즘 절대빈곤에 허덕이는 국민들이 전체 인구(3천8백만명)의 절반에 달한다고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최고 중심가인 코리엔테스에 위치한 중남미 경제연구소의 후안 루이스 부르 소장은 "올 들어 성장률이 4%대의 회복세를 띠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같은 추세가 최소한 7∼8년은 지속돼야 98년 수준을 회복할 수 있다"며 "GDP의 1백%가 넘는 외채는 또 어떡하느냐"고 한숨을 쉬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률은 지난 2000년에 4.5%의 감소율을 나타낸데 이어 2001년엔 11.3%라는 기록적인 마이너스 성장률을 나타냈다. 경상수지는 8년 연속 적자를 내고 있었고 재정수지는 9년 연속 마이너스 증가율을 나타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70년대 이후 사상 최저 수준인 3천3백달러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1990년대 이전까지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공기업들은 거의 대부분 해외에 매각됐다. 지난 1989년 무려 6천%에 달하는 인플레이션 상황 하에서 집권했던 페론당의 카를로스 사울 메넴 대통령은 재정적자 해소와 외환보유고 확충을 위해 항공 통신 철도 고속도로 항만 석유화학 천연가스 석유 등의 공공 사업체들을 모조리 팔아치웠다. 아르헨티나 최대 기업인 석유회사 YPF도 물론 포함됐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잠시 유입되는 듯했던 달러는 잇따른 경제불안으로 다시 빠져나갔고 민영화에 따른 부작용만 남게 됐다. 공기업들은 민간기업으로 변신하면서 구조조정 차원에서 수많은 실업자들을 양산했다. 철도회사 페로팜페아노 사의 경우 민영화가 이뤄진 뒤 총 6천명의 종업원 가운데 무려 5천명이나 해고하기도 했다. 또 독과점 구조가 뿌리를 내리면서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성장을 위한 투자는 감소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다국적 기업들을 규제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지면서 공공 부문에서 반드시 필요한 투자도 하기 어려워졌다. 아르헨티나 무역협회의 페르난도 라이몬도 부회장은 "당시 공기업 매각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기대했던 경제적 효과는 별로 없었다"며 "파티가 끝나고 난 뒤의 쓸쓸함 같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개방경제의 성적표인 외채 문제는 아르헨티나의 고질적인 외환위기의 주범이었다. 당장 이 달 말까지 IMF에 갚아야 하는 30억달러도 만기연장을 위해 미국측과 조율을 해야 할 처지다. 아르헨티나는 무려 1천3백억달러에 달하는 외채의 문제점을 국민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지난 6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경제학과 건물 안에 '외채 박물관'을 설립했다. 박물관 운영책임을 맡고 있는 시몬 프리스투핀 국장은 "많은 사람들이 외채가 무엇이고 어떻게 생겨나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외채는 배고픔과 불행의 근원"이라고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이 과거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데 설립 목적을 두고 있다면 외채 박물관은 '현재 진행형'인 것이 특징이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53년 IMF와 처음 '인연'을 맺은 이후 지금껏 단 한번도 IMF와의 경제개혁 약속을 이행한 적이 없다. 혹자들은 그래서 "능력도 없는 아르헨티나에 계속 돈을 대주고 있는 IMF가 정말 문제"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빚을 얻어쓰는 데 맛을 들여 정작 뼈를 깎는 경제회생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