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국모 에바 페론(1919~1952). 불과 27세에 아르헨티나의 "퍼스트 레이디"가 되어 33세에 요절한 여성. 죽기 직전 그 유명한 "Don't cry for me Arzentina(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라는 말을 남겨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심금을 울린 그녀.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그녀의 삶은 드라마 그 자체다.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나이트클럽 댄서,라디오방송 성우 등을 전전하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페론을 만나 권력의 최정점에 도달했다. 페론의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던 그녀는 노동조건 개선과 남녀 평등을 위한 입법을 주도하면서 대중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그녀의 묘지에 꽃다발을 갖다놓고 있을 정도다. 에비타는 1919년 아르헨티나의 대초원 팜파스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농장 주인과 농장의 요리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당시 이름은 에바 두아르테.그녀는 15세 때 옷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무작정 상경했다. 식당 허드렛일을 했던 그녀는 타고난 미모를 앞세워 배우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시골 가난한 농부의 딸이 좋은 배역을 따낼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녀에게 운명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1944년 지진으로 인한 난민구제모금 행사에서 당시 노동장관이었던 후안 페론을 만난 것.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에비타는 페론의 연인이 됐다. 결혼을 앞둔 이들에게 첫 시련이 닥쳤다. 페론의 정치적 성장에 위협을 느낀 군부내 실력자들이 그를 감옥에 가둬버린 것.뛰어난 미모에 탁월한 언변까지 갖췄던 에비타는 직접 노동자들 앞에 섰다. 에비타는 "진정으로 당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호소했으며 노조는 총파업으로 보답했다. 페론은 출감 즉시 그녀와 결혼했고 1946년 2월엔 마침내 정권을 움켜쥐게 된다. 그녀는 스스로 재단을 만들어 학교와 병원,고아원들을 설립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의료기차를 만들어 전국을 누볐다. 에비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그녀는 말년에 부통령직에 욕심을 냈다. 정부 각료 인사에 과도하게 개입하다가 결국에는 군부의 반발을 사 남편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1952년 에비타가 사망하자 그녀가 정부 예산을 통해 벌여놓은 일들은 하나 하나 파탄을 맞이했다. 돌이켜 보면 에비타는 국민들에게 더 많은 휴가와 높은 수준의 연금과 복지 혜택을 주려고 했다. 정치참여와 교육 등의 분야에서 남녀 평등을 앞당긴 것도 그녀의 공로였다. 하지만 인기가 곧 권력이라는 등식에 집착했던 그녀는 남편과 함께 아르헨티나에 포퓰리즘의 씨앗을 뿌려놓은 것 또한 사실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