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충직한 곰 한마리가 주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어리석은 곰에 대한 우화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착한 곰이 낮잠 자는 주인을 성가시게 하는 파리를 잡기 위해 앞발을 들어 힘껏 내리쳤다는…. 이 당혹스런 이야기의 결론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파리는 도망갔고 얼굴을 얻어맞은 주인은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았다. 선(善)한 의지라 하더라도 합리적 방법론의 인도를 받지 못했을 때 얼마나 엉뚱하고도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까지'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곰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엉뚱한 궤변과 공갈을 준비한다면 어리석은 곰 이야기는 실로 무서운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제2편을 예약하게 된다. 2편은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시작된다. 주인이 곰의 앞발에 맞아 죽은 것을 보고 동네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목도하고 분개해 곰을 향해 소리쳤다. "너는 어찌하여 네 선량한 주인을 죽였느냐." 어리석은 곰이 이빨을 드러낸 채 핏발선 눈으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똥파리를 보고도 잡지 말란 말이냐!" 곰의 대답을 듣고 사람들은 몸서리를 치며 황망히 흩어졌다. 물론 이 2편은 기자가 만들어낸 이야기지만 불행히도 참여정부 들어 이같은 강변과 협박의 논리가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무엇을 하지 말란 말이냐"는 화법은 놀랍게도 장관들의 입에서,급진 사회단체들의 입에서,핏대를 세우는 허다한 토론들에서,심지어 대통령의 입에서까지 그 기세를 높이고 있다. 논란이 끊이지 않는 비정규직 처우개선 문제며,상속세 완전포괄제도를 둘러싼 논쟁들이며,집단소송제를 에워싼 토론들에서 이런 논법은 거침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언론개혁 문제며 북핵문제 역시 이 범주를 못 벗어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당신은 비정규직 처우개선에 반대하는 것이냐"는 주장을 세우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합리적 토론의 문은 닫혀버리고 만다. 실업자만 양산할 것이라는 복잡한 설명 따위는 반대론자들의 불길한 예언으로 치부될 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부자들이 세금을 한푼도 안내고 상속하는 데 찬성한다는 말이냐"는 논박이면 상속세 완전포괄제도라는 것이 실효성도 없을 뿐더러 결국엔 부자들에 대한 증오에 찬 고발 따위만 부추길 것이라는 반대주장 역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렇다면 당신은 신문들이 오보를 써도 좋단 말이냐"는 주장이면 언론 자유 역시 깨끗하게 봉쇄할 수 있고 "그렇다면 환경은 파괴되어도 좋다는 말이냐"는 공격이면 국책사업들을 둘러싼 진지한 토론들도 잠재울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북한과 전쟁을 하자는 것이냐"는 공갈이면 남북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 대신 그 자리에 정체 불명의 통일신학(神學)을 떡 하니 들여앉힐 수도 있다. 마치 지난 독재시대에 그 모든 합리적 지적들을 "안보!"라는 원리주의에 두들겨 맞추려고 했던 것처럼…. 불행히도 그 결과는 어리석은 곰이 만들어내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비정규직은 다시 실업자로 밀려날 것이고 기업가의 창의성은 부정되며 경제는 서서히 해체되는…,결국 원리주의적 주장만이 목소리를 높이는 중세적,주자학적 이념사회로 돌아가고 만다. 오도된 선(善)한 의지가 악(惡)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정신의 근대화를 의미한다면 우리 사회는 아직은 전통사회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말도 되겠고….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