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일조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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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 베어무는 순간 입안 가득 향기와 단 물이 퍼지는 한국의 배는 세계의 명과일로 꼽힌다.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소리는 '봄철 내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와 가을철 내 사위 배 먹는 소리'라는 옛말도 있다.
이런 한국 배가 올해엔 제 맛을 못낼 지 모른다는 소식이다.
복숭아와 포도도 맛이 영 신통치 않다.
잦은 비와 적은 일조량(日照量) 탓이다.
일조량은 모든 생물의 생명 유지와 건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햇볕이 모자란 곳에서 사는 사람은 비타민D 부족으로 구루병에 걸리거나, 세로토닌 분비가 잘 안돼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질 수도 있다고 한다.
식물의 생장에도 일조량은 필수적이다.
일조량은 과일의 크기 당도 색깔 육질을 모두 좌우한다.
온도를 맞춰주면 익기는 하지만 당도와 부드러운 맛은 떨어진다.
여름내내 폭염에 시달린 프랑스에서 강렬한 햇볕 덕에 20세기 최고라던 47년산 포도주보다 더 좋은 와인이 생산된다고 야단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국내에선 그러나 올해 걸핏하면 쏟아진 비 때문에 일조량이 턱없이 부족했다고 한다.
6월부터 8월 중순까지 전국 10대 도시의 일조량(3백13시간)이 평년의 71%로 10년래 최저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배를 비롯한 가을 과일의 수확량이 줄어들게 된 건 물론 맛과 향기 모두 시원치 않다는 얘기다.
워낙 잘 익어 예년보다 일찍 땄다는 프랑스 포도와 달리 국내 포도는 도무지 까맣게 익지를 않아 줄기껍질을 벗겨놓는(포도나무가 위기를 느껴 열매를 빨리 숙성시키도록) 비상책을 쓴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쌀 생산량 또한 지난해보다 4% 줄어들어 95년 이후 가장 적을 전망이라고 한다.
벼의 키는 작고 포기당 이삭 수와 이삭당 벼알 수도 평년보다 적을 뿐만 아니라 조생종 벼 일부는 아예 알이 여물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린다.
고추도 웃자람 현상에 역병까지 번져 수확량이 확 줄었다는 소식이다.
그래도 볕 좋은 가을 날씨 하루면 쌀 1백만석이 늘어난다고 한다.
9월 만이라도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면 과일의 맛이 바뀌는 건 물론 쌀 풍작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 마음을 모아 기양제(祈陽祭)라도 지냈으면 싶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