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의 '4만弗 신화'] (下) '노사분규 없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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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자동차부품회사인 IEE의 허버트 야콥 반 멜른 사장.
그는 지난 7~8월 두달동안 한국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주요 고객중 하나인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파업으로 영업에 적지않은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한국 자동차업체들의 노사분규로 한국 현지 기술연구소 설립 계획이 차질을 빚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해야만 했다.
"한국을 전진기지로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시장 진출을 가속화하려고 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업체인 현대차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해 걱정 많이 했어요. 현대차처럼 세계적인 회사의 파업은 우리같은 해외 협력업체에도 연쇄적인 피해를 주게 됩니다."
분규를 경험해 보지 못한 탓인지 한국의 호전적인 파업 장면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멜른 사장은 "기업인들은 노사불안정 같은 경제의 불확실성(uncertainty)을 싫어할 수 밖에 없다"며 한국의 노사분규를 우려했다.
룩셈부르크에서는 '노사 분규'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다.
노사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룩셈부르크 노동부를 방문했다.
올들어 분규가 몇건이나 발생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마리즈 피쉬라는 담당 공무원의 대답은 뜻밖에도 "제로"였다.
말 그대로 단 한 건의 노사분규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올해 뿐만아니라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6,7년전쯤 공공부문 노조에서 연금 때문에 약간의 마찰이 있었지만 그때도 파업까지 치닫진 않았다"며 자신이 노동부에 근무한 이래 노사분규 발생 기록은 없다고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놀랍게도 룩셈부르크에서는 1921년 이후 무려 80여년간 단 1건의 노사 분규도 일어나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 철강 산업의 침체로 심각한 경제 위기가 발생, 철강회사 종업원들이 회사에서 내쫓기는 상황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도 파업은 일어나지 않았다.
쟁의행위가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다.
룩셈부르크 노동부에 따르면 노사간 분쟁이 발생해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사유를 명확히 밝힌 뒤 쟁의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사례는 없다.
룩셈부르크의 안정된 노사관계는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문화와 오랜 노조의 역사에서 비롯됐다.
룩셈부르크에 노조가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반.
룩셈부르크 기독교노조연맹(LCGB) 조 스피어 홍보담당 국장은 "당시에는 독일의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이 정치투쟁을 벌이기도 했다"며 "1백여년에 걸친 시행착오를 통해 노사관계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노사 양측이 모두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경제부의 호맹 후아지 국장은 '작은 나라'의 특성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대화의 문화를 배경으로 꼽았다.
"나라가 작다보니 한다리만 건너면 서로가 다 아는 친구 아니면 친척이에요. 노사협상 테이블에 앉아보면 사측 대표와 노조 대표가 친구인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대결보다는 대화로 해결책을 찾게 되는거죠."
또 독일과 프랑스 등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내부 분열은 곧 국가의 존망과 직결된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정서에 짙게 깔린 것도 화합의 문화와 맥을 같이한다.
IEE에 근무하는 한국인 김윤희씨는 "오랜 침략의 역사를 겪으면서 룩셈부르크인들의 마음속에는 함께 힘을 합쳐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뿌리 내리게 됐다"며 "이런 민족성 덕분에 지금은 이웃나라보다 더 잘 살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지금과 같은 노사안정의 결정적인 계기는 1977년의 '노사정(Tripartite) 합의 모델'.
70년대 철강산업의 침체로부터 촉발된 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와 사용자,노동자가 마련한 합의안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할 때까지 노ㆍ사ㆍ정이 외국자본 유치에 저해되는 행위를 하지 않고 조기퇴직제도를 도입해 불필요한 해고를 최대한 줄인다는 것이 골자였다.
일명 '룩셈부르크 모델'로 불리는 이 합의 정신에 따라 정부와 기업간의 정책 협조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철강회사 아르셀로가 90년대 문을 닫은 남쪽의 벨발-우에스트 공장지대에 정부와 공동으로 뉴타운을 설립키로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정부는 국토의 균형개발을 위해 남부를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아르셀로는 방치된 폐쇄 공장을 처리해야만 했다.
양쪽의 이해가 뉴타운 개발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아르셀로의 폴 버트메스 홍보팀장은 "뉴타운 설립 계획은 정부와 우리 회사 모두에 이익이 돌아가는 '윈윈' 프로젝트"라며 "정ㆍ경유착과 정ㆍ경협조는 분명 다른 형태"라고 강조했다.
노사안정과 '정ㆍ경 협력'의 문화는 외국기업을 끌어들이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미국계 타이어회사인 굿이어 룩셈부르크 현지법인의 실비아 지첸 인사부장은 "룩셈부르크의 안정된 노사 관계는 노조의 파업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 이웃나라와 대비돼 더욱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첸 부장은 "2주일에 한번씩 노조 대표들과 만나 한시간씩 회의를 갖고 회사경영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며 "전세계 현지법인 가운데서도 노사 관계가 안정된 모범적인 법인으로 손꼽힌다"고 덧붙였다.
'노사분규 없는 나라'라는 이미지는 룩셈부르크를 금융강국으로 자리매김되는데 특히 많은 기여를 했다.
금융감독원 니콜라스 샤우스 국장은 "금융회사들은 무엇보다도 안정성을 중요시한다"며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고 노사분쟁이 없는 '조용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다국적 금융회사들을 끌어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룩셈부르크 시티=김미리 기자 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