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德根 < KDI 국제정책대학원교수 / 통상법 > 지난 주 멕시코 칸쿤에서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던 세계무역기구(WTO)각료회의가 제대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채 폐막됐다. 이번 각료회의는 2001년말부터 진행되고 있는 도하협상의 중간점검회의 성격을 가지고 향후 협상의 범주와 방향을 설정할 예정이어서 1백46개 회원국들 모두 제각기 최대한 자국 이해를 반영하는 데 진력했다. 이번에 잠정 합의를 도출하지 못함으로써 2004년말로 예정된 도하협상이 시한내 완료될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 그러나,지난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도 예정 시한을 넘기며 8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결과적으로는 애초 계획하지 않은 WTO의 설립을 비롯하여 획기적인 세계통상체제의 변혁을 이루어낸 바 있다. 이번 회의에서는 UR 당시에 비해 WTO 회원국들이 제각기 FTA 체결에 열을 올리고 있어 주목된다. 현재 많은 회원국들이 WTO만을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는데,이러한 경향은 미국과 유럽연합을 비롯한 선진국들뿐만 아니라 개도국들에서도 공히 나타나고 있다. 칸쿤회의에서 합의 도출에 실패한 직후에도 양자간 무역협상에 주력하겠다는 각국의 반응들이 나와 UR 당시와는 사뭇 다른 기류를 감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도하협상의 추이는 우리에게 안도보다는 더 많은 우려를 야기한다. 우선, 산업활동의 많은 부분을 수출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양자간 협상방식으로 통상문제가 제기되는 경우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또한,우리의 무역구조상 무역적자가 큰 국가들에 대해서도 완제품 수출을 위한 중간재나 원자재 수입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우리의 입장이 그다지 확고하지 못하다. 이러한 경제 현실 속에서 우리의 통상협상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통상체제가 양자간 협상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치우칠수록 우리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통상관계를 설정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결국,이러한 양자 차원의 통상관계 정립은 경제력 및 정치력을 앞세운 선진국들에 유리하게 이루어지기가 쉽다. 뿐만 아니라,국내적으로는 한-칠레 FTA 추진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아직 양자간 무역협상을 통상정책의 기조로 진행하기에는 정치적 사회적 체제가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한-칠레 FTA 진행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경제적인 관점에서도 FTA 자체에 의한 혜택이나 이득보다 국내에서의 조정비용이 도리어 클 소지가 많다. 총교역규모로 우리의 교역대상 30번째에도 들지 않는 칠레와 FTA를 발효하는 데 이처럼 막대한 지원금과 보상금이 요구되고 있는 판에 주요 교역대상국을 상대로 FTA를 통해 WTO체제를 대체하는 통상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은 아득한 희망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번 칸쿤회의의 결과는 선진국에 대한 개도국의 승리도 아니요,우리의 승리는 더더욱 아니다. 먼 이국땅에서 우리의 농민이 안타깝게 희생된 결과가 향후 어떤 파장을 야기할지 우려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협상은 그것이 양자간이건 다자간이건 상호주의에 입각하는 바,우리의 농산물 시장을 철통같이 방어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이나 그럼으로써 우리가 포기하고 감수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농업 피해를 줄이기 위해 농산물 시장개방을 포기하는 것과 그 대가로 수출시장이 막혀 국내 실업이 가중되고 농민의 자식들도 일할 기회를 잃어버려야 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은 언제까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이러한 체제를 고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은 현재 WTO체제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선진국도,그렇다고 저개발국도 아닌 중도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전반적으로 균형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앞으로 우리 정부는 다자간 규범에 기초한 국제통상체제 수립을 위한 우리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하고 다자체제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될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나마 하이닉스에 대한 부당한 수입규제조치를 하소연할 곳은 WTO이지 301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dahn@kdischool.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