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선의(善意)로 포장된 길..金秉柱 <서강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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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그 결과가 실패로 끝나면 본래의 뜻이 빛을 바랜다.
좋은 씨앗이 좋은 열매로 결실되려면, 정열에 경험과 지식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의 아노미(Anomie) 현상은 '개혁'세력이 자기네가 선의(善意)와 열정으로 충분히 무장됐다는 자신감에 도취해 모든 반대의견을 반동세력으로 몰아 압도하려는 기세에서 비롯된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개혁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기득권 세력들이 그 해결을 가로막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개혁 열정만으로는 문제 해결은커녕 오히려 고질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집권세력 핵심의 드높은 개혁의지를 나무랄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열정을 지식과 경험으로 담금질하는 데는 고집스럽게도 우둔하다는 게 문제다.
이 같은 아집이 쓰디쓴 실패로 결실될 공산이 매우 높다.
과거 정권들도 제 나름으로 좋은 뜻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개혁의지를 가졌다가 실패를 자초한 사례가 허다하다.
바로 지난 정부만 해도 그렇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요즘 골칫덩어리인 가계부채문제만 해도 그렇다.
거시적으로는 가계 빚 덩치가 엄청나 소비가 위축돼 경기회복을 어렵게 하고, 미시적으로는 신용불량자가 늘어나 가정파탄, 가족동반자살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현재 가계부채가 4백39조원(6월말), 신용불량자가 3백35만명(7월말)에 이르렀다.
그 중 신용카드 관련 신불자가 62%이다.
그들 가운데 특히 20대에서 40대까지 한창 일할 경제활동 세대가 80%를 차지하고 있어 앞으로 국민경제의 역동성과 경제주체의 윤리성에 커다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암울한 사태의 시발은 지난 정부의 '좋은' 뜻에 있었다.
해외시장경기가 부진한 가운데 국내 소비지출을 진작시키고, 신용카드 사용을 권장해 조세원천을 밝히고 그 폭을 넓힌다는 의도를 탓할 수 없었다.
정작 기막힌 대목은 규제개혁위원회가 종전의 월 70만원이던 카드현금서비스 한도를 관치금융의 잔재로 몰아 모두 철폐한 일이다.
그 동안 소외됐던 서민가계에게 금융혜택을 누리게 한다는 '착한' 마음씨 때문이었다.
동 위원회가 간과한 것은 금융규제가 완화될수록 건전성 규제는 오히려 강화돼야 한다는 금융감독의 ABC였다.
그들은 모든 규제를 관치금융과 동일시하는 무지의 만용을 자행했다.
카드이용자는 한때 신나는 쇼핑 잔치를 벌였다.
소득 능력을 초과한 지출의 결과는 불을 보듯 자명했다.
금융전문가들의 경계성 발언을 경청했더라면 오늘날처럼 빚잔치의 허망한 종말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일이다.
당시 규제개혁위와 관련정책기관에 관계했던 인사들이 작금의 중산가계 함몰, 서민가계 파탄, 가족동반자살을 보고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약 주려다 독을 준 셈이다.
모두 무지의 소산이다.
다른 하나의 사례로 의약분업조치를 들 수 있다.
이 조치는 의약품 과오용을 없애고 선진사회를 앞당긴다고 크게 홍보됐다.
약사 의사 한의사들이 각기 다른 이해관계로 벌어진 길고 긴 집단행위 끝에 어렵사리 매듭졌다.
그 결과에 국민은 만족하는가.
만족은커녕 스스로를 최대 희생자로 여기고 있다.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의 조사에 따르면 88%의 국민이 의약분업이 국민에게 손해를 입혔다고 생각하고 있다.
환자는 높아진 의료수가, 약품구입의 불편 등으로 고생한다.
약품의 오남용이 근절된 것도 아니다.
선진국에서처럼 편의점에서 간단한 가정상비약을 구입할 수도 없다.
선진국에서는 부작용 때문에 함께 복용하는 것이 금기시된 약들을 처방한 사례들도 여전히 8%나 된다는 지적도 있다.
마약 항생제 등 극소수 약품에 한정해서 의사처방전을 요구하는 수준에서 점진적으로 시작해도 될 일을 거창하게 벌인 결과는 소비자 만족이 아니라 불만족의 증폭이다. 대다수 병·의원이나 약국들도 불만일 것이다.
종전에 없었던 의료인들의 조직화·정치화가 촉진됐다. 이것이 정책당국의 노림수였던가.
선의(善意)로 포장된 길은 어디에 이르는가.
영국 속담에는 지옥이라 한다.
무지로 무장된 선의처럼 가공할 극약은 없다.
pjkim@ccs.sogang.ac.kr